크리스천의 윤리(3) 상황이 나쁘다는 변명 | 여호수아 2:1-7 | 문대원 목사
크리스천의 윤리(3) 상황이 나쁘다는 변명 | 여호수아 2:1-7 | 문대원 목사
올바른 선택을 위해 규범, 실존, 상황의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은 2가지, 마음가운데 기록된 일반계시와 말씀에 기록된 특별계시를 주셨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라 기독교의 규범은 인격적이다
오늘은 상황에 대해 다룬다
나쁜 인간은 없다. 나쁜 상황이 있는 것이지
이 대사를 쓴 사람은 절대적인 규범을 인정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적 사람이 작성했다
모든 것을 상황의 탓으로 돌리는 상황윤리의 전형적인 입장
오늘 설교는 이 것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겠다
좋은 상황에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사람
나쁜 상황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사람
이 2가지를 비교해보면 모든 것을 상황탓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세상에는 좋은 상황에서도 악하게 살고 나쁜 상황에서도 선하게 사는 경우가 있다.
1. 두 가지 규범이 충돌할 때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라합의 고민(목숨을 위한 거짓말 vs 사실대로 말하는 것)
현대인은 거짓말에 대한 죄의식이 없어 목숨을 위한 거짓말을 쉽게 선택하지만 17세기는 클래식한 질문이었다.
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라합은 거짓말을 하여 목숨을 살리려했다.
미국사회에서는 거짓말이 아주 큰 죄이다.
라합의 거짓말은 미국사회에서 큰 죄이며, 분명한 이유와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다.
신약성경에서 라합에 대한 평가 히브리서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히브리서는 라합의 행동을 믿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야고보서 2:25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신약 성경은 라합의 행동을 믿음의 행동, 의로운 행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왜 믿음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인간적인 연민으로 그들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수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여리고 땅의 이방여인 라합은 이스라엘 하나님을 믿고 신앙의 고백으로 숨겨주었다.
성경의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바로왕이 명령에 따르지 않은 히브리 산파들의 행동 (출 1: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왜 그들은 왕에게 거짓말했을까?
히브리스 11:23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이 행동은 믿음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2가지 규범이 충돌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절대자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다.
하나님은 철학적인 개념으로 규범을 주시거나 진공상태에 규범을 주신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규범은 철학적인 규범이 아니라 인격적인 규범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규범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구체적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다.
성경은 고리타분한 책이 아니라 실제 우리 삶에 적용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말씀이다.
이 복잡한 상황가운데 가장 선한 길을 보여준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고 성경은 그 행동을 칭찬하였다.
2. 상황 윤리의 주장과 그 한계
실증법에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사람은 규범에 대한 개념이 없다.
내가 처한 현실, 나의 상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진리와 규범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상황윤리’를 강조한다.
조셉 플레처, 상황윤리 성경을 믿는 신학자이지만, 자유주의 신학자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모두 강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한다. 6가지 명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전체 진리에서 떨어져 특정한 부분만 강조한다 (1) 오직 사랑만이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다 (2) 행동을 결정하는 유일한 규범은 사랑 (3) 사랑과 정의는 동일한 것 (4) 사랑은 이웃의 행복을 구하는 것 (5) 사랑(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6) 사랑의 결정은 규범적이지 않고 상황적이다
자유주의 신학이 불편하지 않은 이유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이기 때문
조셉 플레처 사랑과 정의는 동일한 것이다?
사랑과 정의가 동일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용서하면 되지, 굳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필요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돌아가셔야 했다.
크리스천이 전쟁에 참여해도 될까?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비폭력주의를 말씀하고 있는데?
기독교 역사에서 전쟁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있었다
초대교회는 평화주의, 징집에 거부되었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고, 게르만 족이 로마를 포위하고 약탈하기 시작해 기독교 왕국이 공격을 받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정의로운 전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방어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
어거스틴 “정의로운 전쟁”
(1) 방어를 위한 전쟁 (2) 과도한 무력 사용 금지 (3) 정당한 권위를 가진 대표자의 선언
성경에 정의로운 전쟁은?
아브라함 조카 롯이 가나안 왕에게 잡혀가는 장면
예수님의 산상수훈 원리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예표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죄로 타락한 사회이다. 현실사회에서 우리 가족이 공격당했을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옳지 낳다.
원칙적으로는 신고해서 공권력으로 처벌해야 하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는 정당하게 방어를 해야 한다.
[창14:15]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디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히브리서 11:32
악한 자들의 공격으로 부터 선량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은 필요한 일
상황윤리의 근본적인 문제
3. 사랑과 율법은 배치되지 않는다.
조셉 플레처의 주장 만일 율법의 조항이 사랑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율법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율법 사이에는 가끔 갈등이 있을 수 있다. 사랑과 율법은 동료가 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사랑이 담겨져 있고 사랑과 율법이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랑과 율법은 배치되지 않는 다는 의미이다.
율법을 지키면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된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계명을 주신 분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를 사랑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부부간의 사랑은 혼인 서약을 지키는 것이다.
사랑은 낭만적인 개념,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주어진 약속 그것이 바로 율법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가운데 주님을 사랑하는 것
[수2:1-7] 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6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 그 사람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