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9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끄시는 가정
하나님께서 멀고 먼 그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 먼 곳에서 가나안 그 지역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한게 있죠 바로 땅입니다.
땅을 약속했기 때문이에요.
오늘날도 땅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더 했을 거예요.
농사를 지을 거 아닙니까? 땅이 있어야 집을 지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 땅을 주겠다는 그 약속은 아브라함을 가나안까지 불러내기에 충분했죠
아브라함이 이제 그 가족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갑니다.
근데 문제는 문제는 약속한 땅에 도착하자마자 벌어져요 기근이 찾아오는 거예요.
우리는 희망하는게 있어요 약속의 땅에 들어가자마자 누리는 평안과 안식이에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약속의 땅에 들어가자마자 고통이 고난이 시작하더라는 거예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왜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 도착하자마자 풍년이 아니라 기근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우리 10절 같이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10절입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라함이 애굽에 거료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족들과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기근이 그 가나안 땅에 내 왔던 기근이 너무 무거웠던 것 같아요 성경에도 보면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자주 왔었다라고 기록을 하고 있거든요
창세기 47장에 보면 야곱과 그 가족이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는 장면이 있잖아요
룻기도 역시 그 기근 때문에 모압이라는 그 먼 지역으로 이동하는 그런 내용이잖아요 여러분 이렇게 성경에는 기근이 가나안 땅에 살던 사람들의 삶 전반을 흔들어 놓았던 장면들 우리가 자주 볼 수가 있어요
가나안 땅이 참 특별해요
왜냐하면이 땅이 기근에 참 명령을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적절히 비가 내려야 농사를 지어요 이런 비와 늦은 비를 하나님께서 때에 맞게 내려 주셔야 된단 말이에요.
한해 농사를 실컷 잘 짓다가도 늦은 비를 허락하지 않으시면 농사 다 망쳐 버립니다.
한마디로 가나안 땅은 애굽의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은 하나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공간인 거예요.
하나님만 바라봐야 하는 땅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땅 그 땅이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여러분 반면 애굽은 어떻습니까 애굽은 어때요 애굽에는 커다란 나일강이 흐르잖아요 때문에 물이 풍성해요 물이 마를 일이 없어요 기근이 찾아와도 그 날강의 물을 끌어다 쓰면 돼요 그러니 늘 곡식이 풍부하겠죠 다르게 말해서 애굽 땅은 어떤 땅이냐 하나님 없어도 되는 땅입니다.
하나님 붙들지 않아도 되는 땅이에요.
여러분이 두 땅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한쪽은 약속의 땅이에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땅이에요.
하지만 불안해요 위험하단 말이에요.
다른 한쪽은 죄와 우상의 땅이에요.
하나님 없어도 되는 땅이에요.
그런데 하나님 없이도 안전하고 풍족한 땅이에요.
여러분이 두 땅 중에 어느 땅에 사시겠어요?
여러분 이것은 단순히 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라고요 어떠한 삶을 살지를 묻고 있는 거라고요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분에게 어떤 삶을 살아갈지를 묻고 있는 거예요.
제 아시는 분이 회사를 운영하시는데 이 하시는 업계가 리베이트가 많나봐요
리베이트 없이는 돈 벌기가 좀 어려운 구조인가 봅니다.
그런데 이번이 차마 그 성도의 양심상 자기는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결국 입찰에 운명을 걸었어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입찰이라는 것이요 그야말로 제비뽑기입니다.
쉽게 말해서이 회사의 운명을 제비뽑기에 맡긴 거예요.
근데 그분이 그렇게 고백을 하시더라고요
하나님이 죽지 않을만큼 먹여 주시다라는 거죠 쓰러지려고 하면 하나 주시고 또 쓰러지려고 하면 안아 주시고
그렇게 20년을 버티고 사는 중입니다.
그분의 삶이 어떻겠어요? 하나님 앞에 바싹 엎드리는 삶이었겠죠
하나님 온전히 의지하는 삶이었겠죠 하나님 매달리면서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안 주시면 그냥 굶는 거예요.
차라리 굶겠다라는 의지로 그 회사를 운영하고 계세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어떨까요 정말 뭐 불안하기 짝이 없는 회사 아닙니까 여러분 성도가 살아가야 할 사면 만만치가 않아요 만만치가 않다고요 왜냐하면 성도로 산다라는 건 가나안의 삶의 방식을 살겠다는 걸 말하거든요 여러분 당시에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전 세계 대부분이 텅텅 비어 있어요 그런 곳에 정착하면 방해도 없어요 침략도 없어요 그냥 풍요롭고 편안하게 살 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가나안 온갖 문명의 그 교차로 한 가운데 아브라함을 이끌어 오십니다.
그 메소포타미아와 애굽 문명 사이에 위치하고 있죠 그러니 그 강북들 사이에서 늘 두들겨 맞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런 땅으로 불러내셨다라는 걸 여러분들 기억하셔야 됩니다.
여러분들 세상 사람들 사는 거 보면 어떻습니까?
부럽습니까 그들의 삶이 평안해 보입니까 아닙니다.
겉은 평안해 보여요 그러나 그 안에 숨겨진 불안이 있어요 진리를 찾지 못한 목마름이 있어요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 그 갈증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명품이나 sns로 그냥 뒤덮는 겁니다.
반면 성도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성도들의 삶은 어때요 믿음을 지키는 것 때문에 어디서든 갈등이 있어요 정직하게 살다보니 충돌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신앙의 양심 때문에 걸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삶의 현장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니까요 여러분 성도가 기억해야 될 것은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가는게 아니에요 그건 목표 아니에요 성도는요이 땅에서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이 땅에서 해야 될 일인 겁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늘 고난이 있을 거라는 말이 아니에요
제 말은 각오 단단히 하시라는 겁니다.
공원에 가면 아이들을 막 풀어놓습니다.
그럼 스쿠터를 타고 어디 간지도 몰라요 가까운 서문시장에도 자주 가요 서문시장에 가면요 사람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정말 많아요 그땐 어떻게 해요 아이 손을 꼭 잡고 걷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들판에 풀어 주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손을 꼭 붙잡는 걸 더 좋아하세요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은 그런 복잡한 삶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린아이와 같기를 바랍니다.
애석하게도 아브라함은 그러지를 못했던 것 같아요 결국 어디로 갑니까 애굽으로 갑니다.
11절에서 15절 우리가 같이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11절에서 15절입니다.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창세기 12장 11절~15절
아브라함은 사례를 그냥 아름답다고 말해요
근데 14절에 보시면 애굽 사람들이 사례를 봤을 때 심히 아름답다라고 심이라는 표현을 써요 무슨 말이냐면 객관적으로 사례가 아름다웠다는 거예요.
당시 사례가 65세거든요 사례가 127세에 죽어요 우리와 노화 속도가 다르다는 거예요.
우리로 치면은 40대 정도 나이라는 겁니다.
더글로리 혜교 누나가 41살이거든요 이제 감이 오시죠 아 그럴 수 있겠구나 아브라함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볼 때에도 그랬다는 거예요.
당신이 너무 아름다우니 애굽에 내려갔을 때 내가 죽을까봐 두렵다는 거예요.
그러니 누이라고 하자 살아는 뭐 실제로 이번 누이긴 합니다.
그래도 어떻게 아내를 누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참 한심한 남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얼마나 못났으면 남편이 얼마나 못났으면 아내를 보호해주고 지켜주지는 못할 망정 누이라고 할까 지금 같았으면 당장 가정법원에 갔겠죠
하지만 당신 문화는요 나그네에게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아요 나그네가 강도를 당해도 모른 체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재판할 권리조차 주지 않는게 당시에요 철저히 모든 법이나 체계가 거주민 중심이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나그네 아내가 아름답다 그러면 나그네를 죽이고 아내를 얼마든지 뺏을 수 있는게 당시 사회 문화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불안이 근거 없진 않았다는 것이죠 그래도 그래도이 방법밖에 없었을까 그걸 아는 사람이 애굽으로 내려가야 했을까 하는 의문은 남습니다. 어쨌든 애굽에 도착을 합니다.
사례의 미모 때문에 온 애굽이 난리가 나죠 고관들이 바로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바로가 사례를 데려갑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아브라함 행적이 어떻습니까 어때요 약속의 땅에 도착하자마자 애굽으로 내려가잖아요 백번 양보해서 어쩔 수 없다고 칩시다 일단 살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죠 그런데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요 바로에게 넘겨준단 말이에요.
이게 더 큰 문제예요 왜냐하면요 자녀를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잊은 것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두 가지가 있죠
뭐예요 땅입니다. 그리고 자녀입니다.
그런데이 둘 다 까맣게 잊어버린 거예요.
이 두 가지 다 하나님의 약속 따위는 안중에 없는 거예요.
그에 관심은 어두워진 뭐에 있어요 자기 자신의 안전이에요.
14절에 보면 내가 안전하고 내 목숨이 보존되리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자기밖에 몰라요 여러분 주위에도 자기밖에 모르는 남편들 많이 보지 않습니까
제가 좀 그랬습니다.
제 아내가 첫째를 낳을 때가 됐습니다.
병원에서 산통을 엄청 고통 죽으려고 하더라고요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애가 나오지 않는 거예요.
기다리다 보니까 배가 고프더라고요 그래서 몸을 막 뒤틀고 있는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 밥 먹고 와도 돼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이가 없습니까 그죠 밥 먹고 오겠다니 마지못해 이러면서 먹고 오라 하더라고요
병원 앞에 갈비탕집 맛있는 데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한 그릇 먹고 왔어요 맛있더라구요 지금 후회하고 있습니다.
저도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은 합니다.
근데 저보다 더 한 분이 계세요 은혜가 안 될까봐 이름을 밝힐 순 없습니다.
우리 교회 부목사님 중에 한 분입니다. 이번 사모님이 산통하실 때 밥 먹고 오면서 휴대폰까지 바꾸신 분이 있어요
여러분 어떤 남편은 자식이 굶어도 취미는 포기할 수 없는 남편들이 있어요 죽어도 술은 마셔야 되는 남편들이 있어요
가족이 어찌되도 상관이 없어요 자기가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지금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 아니에요 살에 아니에요 자기 목숨인 거예요.
자기 목숨 여러분 안전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목숨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약속을 잊으시면 안 돼요 약속을 해 주시면 안 돼요
우리가 약속을 읽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될 때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라는 걸 여러분들 기억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수많은 신앙과 불신앙의 선택 앞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 주로 이러한 선택 앞에서 뭘 택합니까 불신앙을 우리는 택해요 왜요 안전해 보이거든요 교회를 나오지 못했던 건 성적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에요.
거룩하게 살지 못했던 건 직장 문화가 그랬기 때문이에요.
불의해도 눈을 감아야 했던 건 사회 구조가 그렇기 때문이에요.
진실되지 못한 건 세상 모두가 그렇게 사는데 나만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자리를 지켜야 했던 건 우리 가족들 때문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
우리가 했던 그 모든 불신앙의 선택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우리는 다양한 이유들로 불신앙을 선택하게 됩니다.
근데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어떻게 됩니까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을 지킵니까 아니에요 다 잃어버려요 약속의 땅과 멀어지잖아요 자녀를 낳을 사례를 잃어버리잖아요 다 잃어버립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17절 우리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17절입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아내의 사례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사례를 데려갑니다.
이대로 되면은 이대로 계속 두면 하나님의 약속이 우스워 지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집안의 재앙을 내리십니다.
결국 바로는 사례를 돌려보냅니다.
어떤 재앙인지는 알 수가 없어요 성경에 나오지 않으니까요 뭔지 몰라도 바로 엄청 열 받았나 봐요 뚜껑이 열렸나 봐요 보시면 어찌하여라는 표현을 막 수건 반복해요 어찌하여 이렇게 했느냐 어찌하여 아내나 말 안 했느냐 어찌하여 누이라 했느냐 엄청 흥분해서 얘기를 합니다.
이제부터 좀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성경의 이야기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토록 보호하시는 겁니까? 왜 하나님은 이토록 아브라함에게 편애하시는 겁니까?
- 약속의 땅을 떠난 건 아브라함이에요.
-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도 아브라함이에요.
- 사례를 바로에게 내어준 것도 아브라함이에요.
- 하나님의 약속을 까맣게 잊은 건 아브라함이에요.
그럼에도 왜 하나님은 그를 지키시냔 말이에요
자 근본적인 질문을 한번 드려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과 약속을 땅과 자녀를 약속하셨어요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하실 때 아브라함이 이럴 줄 몰랐을까요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기근이 올 때 그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을 떠날 줄 몰랐을까요 애굽에 내려가면 사라를내어 줄 몰랐을까요
불순종할 걸 아셨단 말이에요.
그럼에도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설득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배우자와 한번도 안 싸우신 분 있으세요 없을 거예요.
여러분 결혼 전에 결혼하면 아 우리는 한 번도 안 싸울 거야 싸울 줄 몰랐습니까 아셨잖아요 여러분 두 사람의 그 성격이 이렇게 다른 줄 몰랐습니까 아셨잖아요 그럼에도 결혼했어요 이유가 뭡니까 각오가 되어 있었거든요 가구가 되어 있었거든요 아무리 바가지를 긁어대도 여러분의 가정에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와도 내가이 사람과 하나 되기로 연합하기로 마음을 먹었거든요 그래서 결혼을 하셨잖아요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십니다.
이제 막 가나안에 도착을 했을 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온전한 믿음이 아니에요 여전히 추상적이에요.
여전히 흐릿하단 말이에요.
믿음이라고 하기엔 사실 부족하단 말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지요 그럼 그 믿음이 언제 완성이 됩니까 언제 완성이 됩니까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칠 때 완성이 돼요 그 자리에 완성이 돼요 그러나 그 전까지 여전히 미완성인 믿음인 겁니다.
애굽에 내려가요 아내를 바로에게 내어줍니다.
이삭이 아니라 다른 후사를 준비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그 약속 앞에서 비웃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떠나지 않아요 포기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천천히 설득해 나가신단 말이에요.
결국 이삭을 결국 아브라함을 이삭을 바치는 그 자리까지 끌고 오시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에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내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신지라이 아들이 죽어도 다시 하나님이 살리실 거야라는 거예요.
기근에 도망을 가도 목숨이 아까워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준 그 연약한 자에게서 결국에는 내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거라는 그 믿음의 자리까지 하나님은 꾸준히 우리의 삶을 설득해 나가신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도 여러분의 인생에도 하나님이 그렇게 일을 하세요 믿음 없음에도 신실함을 보이십니다.
여러분이 고난이 닥쳤을 때 건져 주십니다.
여러분의 했던 그 실수를 덮어주세요 우리의 인생 속에서 그 연약한 믿음을 완성해 나가신단 말이에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온 땅에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에 내가 가나안에서의 그 삶의 방식을 택하는 성도로 살게 하세요 하나님은요 그 자리에이를 때까지 여러분을 계속 계속 설득해 나가십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 장 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루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완성을 이루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기대해야 될 건 내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쌓일 때까지 신뢰가 쌓일 때까지 설득될 때까지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이여 믿음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멱살 잡고 너 믿어 너 안 믿으면 죽어 넌 맞아 하지 않으세요 천천히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설득해 나가십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지난날 우리는 수많은 불신앙을 선택을 해왔습니다.
불안했고요 걱정했어요 두려워했고 조급해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보니 어때요 그 모든 연약함들을 돕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있었어요 그 신실하심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이 자리에 와 있는 거예요.
그리하여 어느 날 내 마음이 완전히 설득되어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내게 된단 말입니다.
갈대아우르 나올 당시의 아브라함의 믿음과 이삭을 바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전혀 다른 믿음입니다.
전혀 다른 믿음입니다.
우리는 아직 연약할 수 있어요 그러나 언젠가 하나님이 그 자리에 세우실 거예요.
성도의 자리에 세우실 거예요.
그때까지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서 일하실 겁니다.
계속 일하실 겁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듯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 모든 걸 내어드릴 수 있는 그 자리에까지 하나님은 이끌어 오실 거예요.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은 에젤에 대부분의 가정들이 여러분의 가정과 하나님과 신뢰할 수 있는 그 기간이 너무 짧았어요 그죠 긴 분이 한 10년 정도 되겠죠 여러분의 가정과 하나님과의 그 신뢰의 시간이 아직은 너무 짧아요 그래서 여전히 여러분은 불신앙과 연약함의 모습을 보입니다.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될까 어디서 키워야 될까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될까
그런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서 계속 여러분과의 스토리를 쌓아 가실 거예요.
수많은 스토리를 쌓으실 거예요. 신뢰관계를 만들어 가실 거예요.
그래야 결국에 언젠가 그 어떠한 풍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만드실 거예요.
그렇게 믿음의 가정을 세워 가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여러분을 설득하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3월19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끄시는 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