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 주일설교 전문(클로바노트)
2023.12.31 일 오후 12:33 ・ 31분 18초
저녁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저녁이 있는 삶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있는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반성이 있는 삶입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반성하지 않으면 똑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다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이 어떻게 망가지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실수를 반복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축구에서도 고르러 찬스가 있는데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선수라 하더라도 찬스를 놓칠 수 있습니다.
한 번 실수했다고 해서 나무라는 패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선수는 기회가 왔는데 계속해서 실수합니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죠. 여러 번 기회가 왔는데도 똑같은 실수를 하는 것은 실력입니다.
이렇게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반성입니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조금 과격한 말이지만 맞는 말입니다. 여러분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집에서 고양이나 강아지를 키우다 보면 거의 가족같이 대합니다.
그러다 보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강아지가 아무리 똑똑해도요. 과거의 행동을 반성할 수 없습니다.
돌아보니까 내가 올해 간식을 너무 많이 먹었네. 내년에는 간식을 적게 먹었겠다 생각하는 강아지는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과거의 잘못을 돌아볼 수 있고 반성해서 새로운 결심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에게만 있는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것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쓴 그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개척해서 세우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2천 년 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고린도 교회를 향한 특별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령 안에서 성숙하여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신하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진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보면 익세이었어요. 프리어스입니다. 자신을 검증하고 자신을 증명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 단어가 아주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시험마다 이세민에 해당하는 단어가 헬라어로 페이와 쇼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어떤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기 위해서 주도면밀하게 살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유하자면 자녀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데려왔는데 과연 이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주 자세하게 살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2절에도 이 단어가 나왔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왜
행위와 수고와 내 인자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신 사우라 함에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내가 드러낸 것과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시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칭 사도라고 하지만 실제로 아닌 사람들을 너희가 잘 분별했다고 칭찬하십니다.
지난주 뉴스에 보니까 이란 교회를 jms에게 징역 23년이 선고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면서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내려진 마땅한 처벌입니다.
스스로 사도라고 하지만 실제로 아닌 사람들을 잘 분별해야 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아닌 사람들을 우리가 잘 판단해야 합니다.
그때 사용된 단어가 오늘 본문에 나온 단어 시험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단 교류를 분별할 때 주의 깊게 면밀하게 살피는 것처럼 동일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살피실 때 무엇을 주로 보십니까?
우리가 여러 가지를 살펴야 하겠지만 저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를 살펴봅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감명받지 않습니다.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감명받습니다. 또한 사기 선교를 위해서 헌신해야 된다, 희생해야 된다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헌신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감명받지 않고 실제로 헌신하는 사람에게 감명을 받습니다.
국회에서 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하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말로는 사회 정의를 외치고 고의를 외쳤지만 실제로는 온갖 비리를 저지른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말이 얼마나 공허한 외침이었는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해도 우리가 들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일치했는지 돌아보면 솔직히 부끄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했는지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이 일치하지 못했던 점을 반성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나의 믿음과 나의 삶이 일치하지 못했던 점을 회개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보니까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버림받은 자다라는 그 단어가 헬라어 언어로 보면 가짜로 판명되다라는 단어, 똑같은 단어입니다.
어떤 사람의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 수업을 하고 검증을 했는데 가짜로 판명되어서 버림을 받았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전에 tv에서 진품 명품을 간별하는 프로그래밍이 있었습니다.
집에 있는 오래된 도자기 고문서 이런 것들을 가져오면 전문가가 그 가치를 감별해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고려시대, 심지어 삼국시대 유물들이 나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거기 나오는 참가자들이 오래된 유물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가져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전문가의 감별 결과 가짜로 판명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져온 사람들이 그 물건을 어떻게 대할까요? 진행자에 따르면 가짜로 판명된 그 물건들은 대부분 버리고 간다고 합니다.
올해는 너무너무 소중히 가지고 왔는데 가짜로 판명되면 안 가져가는 거예요.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말씀이에요. 우리 믿음을 검증했는데 시험했는데 가짜로 판명되면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에도 진짜 믿음이 있고 가짜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고 있고 우리가 입술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다 똑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축구 선수라고 해서 다 똑같은 선수가 아니지 조기 축구 선수가 있고 k리그 선수가 있고 프리미어 리그 선수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다 똑같은 축구 선수 같지만 실력 차이가 어마어마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도 다 똑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정말로 성숙한 믿음이 있는가 하면 어린아이 수준의 믿음도 있습니다.
진짜 믿음이 있고 가짜 믿음도 있습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가짜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허탈한 사람 행함이 없는 믿음이 확인 줄을 알고자 하느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헛것이 영어로 유스트 레이스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고 아무 쓸데가 없다는 뜻입니다.
물티슈가 오래되면요 물기가 마르죠. 더 이상 물티슈로서 그렇게 되면 쓸모가 없고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날 물티슈가 필요해서 딱 열었는데 물기가 하나도 없으면 얼마나 허탈한지 모르겠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아무 소용이 없고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반성이 없는 인생, 성찰이 없는 인생의 위험입니다.
내 믿음이 어떤지, 내 성품이 어떤지 반성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고 성장이 없습니다.
나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을 때 그때 나의 약점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미국의 워렌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겸손은 자신의 강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약점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커다란 강점과 커다란 약점을 한아름씩 가지고 있다.
겸손은 그러한 강점과 약점에 모두 솔직해지도록 만든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겸손에 대해서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누가 봐도 똑똑한 사람인데 자기가 똑똑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봐도 노래를 잘하는 사람인데 나 노래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겸손은 자기의 강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 정직하게 돌아보고 나의 약점을 분명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이 겸손입니다.
나의 약점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내 문제가 무엇인지, 내 약점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면 절대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는 겸손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강점과 나의 약점 모두를 인정하고, 부족한 부분에서 변화와 성장을 위해서 힘쓰는 새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아니 아니 오직 우리는 버린 마음과 같은 사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하는데 그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선이 헬라어로 카로우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카로우스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면 그 의미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니까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고 있고요.
마태복음 13장에 천국은 좋은 씨앗을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마태복음 26장에 보니까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해서 어찌하여 너희가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녀가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예가 있지만 제가 세 가지만 골랐습니다. 이 세 가지 용내의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복음서에서 카로스가 가진 공통적인 함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구한다 하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취하는 사람을 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선입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이죠.
하지만 그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 씨앗이 썩어져야 합니다.
자기 희생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선입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그 여인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녀가 나에게 좋은 일을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가 자기의 유익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라는 그 권면은 사회적인 기준으로 좋은 일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선행을 하고 구제를 하라는 그 정도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고 값 비싼 대가를 치르는 사랑을 뜻합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마음으로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이것이 바로 헬라어 칼로스에 담긴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 우리 마음에 더욱더 깊이 다가오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거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선한 목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선한 목자는 착한 목자, 마음씨 좋은 목자, 부드럽고 온화한 목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목자는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목자이고, 양들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랑을 하는 목자입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그런 사랑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선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라고 말했을 때에는 선한 목자 되신 그 예수님을 닮아가라는 의미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리더십 분야의 세계적인 대가 존 맥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최고의 존경은 그 사랑을 닮아가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은 정말 멋진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고 존경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그분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표현하고 싶었던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런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만났던 제 지도 교수님께도 그랬고, 권성수 목사님께도 그랬습니다.
제가 그분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마음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향한 최고의 존경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존경하는 그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최고의 존경입니다.
이 원리를 그대로 예수님께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 우리가 온 마음으로 경비하는 그 예수님을 향한 최고의 존경은 그분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향한 최고의 예배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이렇게 주일날 교회에 모여서 함께 찬양하는 것 예배입니까? 물론입니다.
이렇게 모이는 건 예배가 맞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배의 전부는 아닙니다.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보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올려드리는 것 이것이 최고의 예배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지 내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일까요?
바로 그다음 절에 나와 있습니다. 12장 2절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 새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바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라 이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 따라가지 말고 진리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 우리 몸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생각을 품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진정한 예배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단지 불쌍한 사람 도와주고 부를 돕기, 성금 내고 봉사활동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고 희생하기까지 상대방을 사랑하신 그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가셨습니까? 눈에 보이는 목표를 이루고 성과를 이루는 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도 우리의 말과 환경에서 예수님께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이 아닙니다.
새해에는 올해보다 더욱더 예수님을 닮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서 선한 목자 되신 그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우리에게 온전함을 이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아멘 여기서 온전하다는 그 단어의 의미가 완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된 본성,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이 땅에서 완벽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완벽함을 강요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시는 그런 분 아니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변화되고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미국의 신학자 데이드 가랜드는 성경이 말하는 온전함의 의미를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로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다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갈릴리 어부들이 그물을 짓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구절에서 그물을 깁는다라고 했을 때 그 단어가 바로 온전하게 하다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두 번째로 원래의 목적에 합당하게 만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또 성전의 기물과 재물을 준비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그 목적에 합당하게 만드는 그 과정을 온전하게 하다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온전함에 이르라라고 했을 때에는요 완벽한 사람이 되라는 뜻은 아닙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되고 원래의 목적에 합당하게 다듬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근에 많이 사용하는 표현 중에서 육각형 인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외모, 성격, 학력, 자산, 직업 집안이 완벽한 사람을 뜻합니다.
요즘 청년들은 그래서 육각형 연예인, 육각형 남자, 육각형 운동 선수 같은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원래 이제 육각형 그래프는 축구 선수의 능력을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
축구 선수가 스피드 체력, 패스, 슈팅, 수비 능력을 이제 육각형 그래프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어떤 현준하는 선수도 이 6가지 영역을 다 갖춘 선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한 두세 가지만 훈련해도 아주 탁월한 선수입니다.
프로모 선수도 육각형 능력이 없는데 우리 같은 일반인이 육각형 인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미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마치 육각형 인간이 될 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그런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온전함을 이르라라고 한 것은요 육각형 크리스천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도 많이 읽고 기도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전도도 많이 하고 완벽한 크리스천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 가운데 잃어버린 본래의 신앙을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본래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을 통해서 온전함을 잃어라라는 이 구절을 맨드 유 레이스로 번역한 성경이 있습니다.
너의 삶의 방식을 수정하라 고치라라는 의미이죠.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방식을 수정하기 위해서 노력하십니까? 여러분은 새해가 되면 새로운 결심을 세우십니까? 누구나 새해가 되면 새로운 결심을 세울 것입니다.
부족했던 부분을 돌아보면서 더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심이 잘 지켜지나요? 잘 지켜지지 않나요? 잘 안 지켜지죠 새로운 결심했는데 며칠 동안 노력했지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이제 몇 해 반복하다 보면 나중에는 새해가 되어도 새로운 결심을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결심해봐야 잘 안 되니까요. 그냥 아무런 결심을 하지 않는 거죠.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올해 결심은 아무것도 결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워서 높은 목표를 세워서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꼭 옳은 일이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새해가 되어도 아무런 결심을 하지 않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결심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무런 변화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 때문이죠.
새해가 되었는데도 아무런 변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올해 새해 결심이 아무것도 결심하지 않는 것이 나의 결심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제가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까지의 삶에 100% 만족하십니까? 아무것도 고치지 않을 정도로 지금까지의 생활에 정말로 만족하십니까라고 질문하고 싶습니다.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의 삶을 만족하지 못합니다.
아쉬운 일도 많고 후회가 되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누구나 잘못을 하기 때문이죠.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실수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미 했던 실수를 반복해서 내 인생의 발전이 없고 상대방에게 계속해서 상처를 주고 있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됩니다. 이미 했던 잘못을 또다시 우리가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방식을 수정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면서 성장해야 되는 그 부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할 때 한 가지 유의해야 될 점이 있습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은 금요 기법 안 나오는데, 그래도 나는 금요 기폭이 나온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은 제자 훈련 안 했는데 그래도 나는 제자 훈련했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런 식의 비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성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반성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어제와 비교해서 오늘 내가 얼마나 성장하였는지 돌아보는 것이 진정한 반성입니다.
토론토 대학의 심리학 교수 조란 피더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당신하고만 비교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은 개인에게도 해당되고 교회에게도 사실이에요.
저는 우리 교회를 다른 교회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대구에 있는 그 어떤 교회와도 우리 교회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우리 교회를 과거의 우리 교회와 비교합니다.
1년 전에 비해서 우리 교회가 얼마나 더 열정적으로 주님을 예배하는지 돌아봅니다.
1년 전에 비해서 우리 교회는 얼마나 더 전도와 선교에 헌신되어 있는지 돌아봅니다.
그리고 만약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다른 자녀들하고 비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다른 배우자들하고 비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건강, 커리어, 자산, 영성을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지 마십시오.
오직 어제의 나와 비교해서 내가 지금 얼마나 성장하고 변화되었는지만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얘기했습니다. 그가 자기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문서로, 남에게는 잊지 아니하리니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돌아볼 때 기쁘고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작년보다 내가 기도 생활에 더 힘썼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올해는 작년보다 가족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냈구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랑할 것이 나에게는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시작점이 다르고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유대인 아피 마크마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내 일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습니다.
아동 모험이나
정곡을 찌르는 날이라서 우리 마음이 아플 지경입니다.
요즘 청년들은 이런 경우를 가리켜 뼈 때리는 말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정국을 딱 찌르고 있죠. 만약에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내일이 필요한 이유가 있을까요? 더 이상 변화가 없고 성장이 없다면 우리에게 새 해가 필요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더욱더 기도하고 노력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주님은 왜 우리가 온전함에 이르기를 원하실까요? 그냥 적당히 살다가 적당히 가면 안 될까요?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4장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나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을 새롭게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얼마 전에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에 대해서 설교를 드렸습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원대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교회를 통하여서 온 땅 가운데 복음이 증거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을 새롭게 회복하기 위하여 이 일을 위해서 주님께서 교회를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인 줄 믿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몸된 교회가 세워질까요? 건물을 크게 짓고 화려한 시절을 갖추죠.
교회가 세워드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시설도 아니고 조직도 아닙니다.
교회는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는 것은 사람을 세우는 것이고 성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부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검증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선한 일을 행하고자 더욱더 힘쓰는 새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생각을 닮아가으로 주님의 교회가 든든히 세워질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세상 모든 방법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완성되는데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귀하고 아름답게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