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0530.notion.site/4-30-a5cd7703c48a4fa287abbdf57d4b004e
4/30 주일설교
김한요 목사
0530.notion.site
4/30 주일설교
김한요 목사
얼바인 베델교회 담임목사
어느 아들 편입니까?
누가복음 15:11-24
탕자의 비유의 두 아들의 대치하는 모습이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인생을 보는 시각
큰아들 관점
어쩌면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노심초사하는 스타일, 체면이 중요하고 기존의 문화가 중요, 정죄하는 인생관
둘째아들의 관점
기존틀에 머무는 것을 싫어함,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도전해보기 원함, 진보적인 경향
예수님의 메시지가 이 안에 담겨져 있다.
아들이 있다면 큰아들 처럼 되라고 하고 싶은가? 둘째 아들처럼 되라고 하고 싶은가?
나는 어떤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다 보고 싶은가?
눅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when he came to his senses(NIV)
when he came to his himself(ESV)
회개의 마음 보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철들었다는 의미)
예수님은 탕자에게 초점을 맞추기 보다 큰아들에게 초점을 맞췄다고 볼수 있다.
큰아들 처럼 되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그 길을 가려고 하지 않은가?
성경은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 사회의 문화가 되어 한번도 비판없이 수용하고 그 길을 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믿는 신앙도, 종교도 그 길을 가기 위해, 신앙의 힘을 빌어 출세의 길을 가려고 하지 않은가?
탕자가 스스로 돌이켜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18절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그전에는 내가 죄인인줄 몰랐다. ‘내가 책임지면 되지’.
잘못되면 책임지는 것은 죄에 대한 책임은 죽음으로 갚는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이다.
우리는 실질적으로 우리 죄에 책임질 수 없는 존재이다.
나는 무능한 자입니다. 라고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탕자는 그 전까지 한번도 자신이 회개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한번도 생각한적이 없었다.
회개하는 모든 순간, 나는 하나님앞에 무능한 죄인임을 고백하게 된다.
탕자가 회개를 하는데 이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규모있게 썼더라면? 은행에 두고 이자를 받았더라면? → 이런 것은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정말로 인생을 제대로 뒤집어 보는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내가 생각하는 목표설정이 제대로 된 것인지 처음부터 끝가지 되짚어 보는 것
사람은 투병하면서, 암진단을 받으면서, 사기를 당하고, 임신한 아이가 문제가 있는 사실을 알고, 배우자로 부터 배신을 당하면서 그때 처음 아무것도 할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게 된다.
집을 나가지 않은 큰아들
29절,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I’ve been slaving for you, NIV)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한 것이 없더니
‘나는 아버지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어쩌면 집나간 둘째 아들보다, 집을 나가지 않은 진짜 탕자 큰아들의 말에 더 큰 상처를 받았을지 모른다.
20~21절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우리는 흔히 회개하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이미 우리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그 사랑이 와닿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사랑이 먼저이다. 회개가 먼저가 아니다. 사랑을 경험하면 회개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큰아들 처럼 집을 나가지 않고 지켜야 아버지가 사랑해주는 줄 알았다.
둘째 같다면 마땅히 징계받고, 내쳐져야 할줄 알았는지 모른다.
어떤 철학도 없고, 바보 같은 아버지 처럼 보여질지 모르지만 나는 기쁨으로 섬긴것이 아니라 노예처럼,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억지로 참석하고 예배 안드리고 놀러가면 사고날까봐 예배 드리고 놀러갔는데 그런식으로 살았는데, 나 이정도 하면 염소새끼 한마리는 잡아줄줄 알았는데… 그렇게 노예처럼 살아왔는지 모른다.
유대인들은 큰아들이다. 작은아들은 이방인일 것이다.
이 사회의 문제는 교회 밖의 인간들 때문이다. 제 멋대로 사는 저 인간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큰아들이다.
큰 아들이 동생이 왔다면 먼저 나가 안아줘야 하고, 입을 맞추고 반겨줬어야 하는데 큰 아들은 동생이 못마땅했었다.
우리는 진정한 맏아들 되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됨을 상실함으로) 우리가 아들됨이 복원되고 가락지를 낀 것이다.
예수님의 자유, 예수님의 옷이, 예수님의 영광이 우리의 것이 되었다.
어쩌면 우리안에 탐탁지 않은 큰아들, 새로운 것을 하고 싶어 뛰어다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