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주일 설교
2024.02.11 일
- 새해가 되면 여러 가지 결심을 세우기도 함
- 새로운 습관이 우리 안에 완전히 자리 잡는 데 평균적으로 66일이 걸림
- 새로운 습관이 몸에 각인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사람마다 다름
- 의지력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측정하는 방법을 제시한 사람이 있음
- 인간의 의지력은 무한하지 않고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변화를 경험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임
- 성경은 변화와 회복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함
- 사도행전 3장은 사도들이 행한 첫 번째 기적의 사건이 나옴
-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자를 치유하게 됨
- 하나님께서 자연 법칙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 법칙 위에 계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음
- 베드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이 뜻하신 일을 이루실 수 있다고 믿음
- 예수님께서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랐음
- 기사를 표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베드로의 선포를 통해서임
- 예수님이 누구이시고 그 이름에 어떠한 권세가 있는지 말씀을 깨달으면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됨
- 진정한 믿음이 있을 때에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줄로 믿음
- 구원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영적인 육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
- 놀라운 기적 자체를 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기적의 의미를 깨닫는 말씀 가운데 온전한 믿음을 세우는 신앙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함
- 회개는 잘못했습니다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함
- 회개하고 돌이키라라고 선포한 것은 이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기 위해서임
- 죄가 주는 쾌락을 즐기면서 기분 좋게 살다 보면 머지않아 영혼의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임
- 회개하고 돌이킬 때 진정한 변화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고 베드로는 선포하고 있음
- 회개하면 주님을 향해서 돌이키게 되고 주님께로 돌아오면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기 때문에 성경은 회개와 회복을 똑같은 단어로 표현하고 있음
- 문제를 이기는 힘은 우리의 의지력에 있지 않고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임
-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사랑만이 연약한 우리를 붙잡아주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심
-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변화와 회복의 시작인 줄로 믿음
- 의지력에 관한 최신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의지력은 무한하지 않음
- 제한된 의지력을 잘 사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무너질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임
- 유혹을 이기는 최고의 방법은 유혹을 느낄 만한 상황을 아예 만들지 않는 것임
-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유혹을 했지만 유혹을 이기려고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감
- 빌리그래엄 목사님은 단 한 번도 성적인 스캔들에 휩싸이지 않았음
- 빌리그래엄 목사님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았기 때문에 유혹받을 것 같은 상황 자체를 피했음
- 유혹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나는 줄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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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새해가 두 번 있는 특별한 나라입니다.
양 설날이 있고 음력 설날이 있습니다. 외국 친구에게 우리는 새해가 두 번 있다고 하면 엄청 신기해합니다.
새해가 되면 여러 가지 결심을 세우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난 1월 1일에 세웠던 결심을 잘 지키고 계십니까?
새해가 시작된 지 40일 정도 지나서 음력 설날을 맞이했는데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제가 2년 전 새해 설교에서 새로운 습관이 우리 안에 완전히 자리 잡는 데 평균적으로 66일이 걸린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심 3일을 22번 하면 새로운 습관을 만들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습관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나왔습니다. 미국 살로 캘리포니아
01:08
웬디 우드 교수에 따르면 새로운 습관이 몸에 각인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행동의 종류에 따라서 그 행동이 자동화되기 위해 필요한 반복의 횟수가 다 다르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탄산음료 대신에 물을 마시는 습관을 위해서는 59일간의 반복이 필요합니다.
점심 식사 때 야채와 과일을 챙겨 먹는 습관을 위해서는 69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매일 30분 이상 운동하는 습관을 위해서는 91일 동안의 반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습관이 형성되는 시간을 측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의지력이 다르고 우리의 의지력이 꾸준하게 지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작은 반이다라고 우리가 야심차게 말하면서 시작하지만 실제로 그 일을 끝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은 시작일 뿐이다라는 말입니다.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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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 아니라 시작은 시작일 뿐이다라는 거죠.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변화를 지속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다이어트한 이후에 그것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 5년 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는 전체의 15%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인간의 의지력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측정하는 그 방법을 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로이 바우마이스터라는 교수님 그는 의지력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력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체력이 무한하지 않은 것처럼 의지력 또한 무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하루에 4시간 자면서 쉬지 않고 일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몸이 아프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체력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03:22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지력 또한 무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정된 의지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다 소진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의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가장 쉬운 예로 우리가 아침에는 일어나기 힘들어도 의지를 가지고 일어날 수 있지만 저녁이 되면 그 모든 의지력을 다 소진했기 때문에 그냥 누워서 tv를 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크고 작은 유혹 앞에서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행동을 하면은 후회를 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혹에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력은 무한하지 않고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한 변화를 경험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일까요?
성경은 변화와 회복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오늘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3장은 사도들이 행한 첫 번째 기적의 사건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비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던 자를 치유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3장
04:30
6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04:36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라 베드로가 믿음으로 선포하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서 걷게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놀라운 치유의 역사를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타날 온전한 회복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기적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기적에 대해서 논하려면 먼저 기적의 정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적의 사전적 정의는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귀한 일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이성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식은 얼마나 믿을 만할까요? 여러분 회담에는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평생 술을 마셨는데도 간이 멀쩡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평생 술을 한 번도 안 마셨는데 간경화에 걸리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인과관계가 맞지 않는 일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우리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05:50
또 다른 예로 어떤 사람의 몸에 종양이 있어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수술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이후에 회복 과정까지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수술받은 부위가 잘 낫고 장기가 원래의 기능을 회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고 해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할 수 없는 부분이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 갇힌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법칙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자연 법칙 바깥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연 법칙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법칙에 구속되지 않으십니다.
그 법칙 안에서 일할 수도 있고 그것을 넘어서 일하실 수도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컴퓨터 게임을 만든 사람과 그 게임을 하는 사람의 차이와도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 컴퓨터 게임을 하는 사람은 내 캐릭터가 죽으면 끝입니다.
06:51
잘못 조정해서 죽으면 끝이죠. 하지만 그 게임을 만든 사람은 얼마든지 죽었던 캐릭터를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혹은 특정한 캐릭터가 영원히 죽지 않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비유가 100% 정확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자연 법칙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 법칙 위에 계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연 법칙 안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는 기적이지만 그 자연 법칙 바깥에 계신 하나님께는 그 어떠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이 뜻하신 일을 이루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생명의 주인 되신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할 때 성전 안에서 구걸하던 그 자가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성전 안에 있던 유대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목도한 그들은 베드로에게 큰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08:02
베드로는 진정한 사도였고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나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놀라운 일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열광합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적과 기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표적입니다. 기사를 영어로 원더어라고 하고, 표적을 영어로 사인이라고 합니다.
이 둘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기사는 인간의 입장에서 놀랍고 신비로운 일을 뜻합니다.
그에 비해서 표적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표적이 영어로 싸인인데 그 의미는 무언가를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09:17
그분의 능력과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지 드러내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표정 입니다.
사도행전 2장 22절에 보면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 베푸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놀랍고 신비로운 일도 행하시고,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는 일도 행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서 걷게 되는 거 놀라운 일을 행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크게 사람들이 놀라고 있을 때에 베드로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설명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6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이름을 이름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하는
10:16
이 사람을 낳게 한 것이 예,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베드로의 선포를 통해서 사람들은 놀라운 기적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전 까지는 단순히 인간의 입장에서 놀라운 기사 원더였는데, 이제는 그 기적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선포를 통해서 기사를 표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적이 사람을 바꾸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못 보였던 사람들 중에서 다수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놀라운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예전으로 돌아가서 똑같이 생활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기적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기적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기적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베드로가 선포한 그 진리의
11:25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시고 그 이름에 어떠한 권세가 있는지 말씀을 깨달으면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진정한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본질적인 변화, 완전한 변화를 가리켜 성경은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구원을 헬라로 소우지라고 하는데, 이건 단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병 들었던 사람이 낳게 되는 것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귀신을 했던 사람이 온전하게 되는 것도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영적인 육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하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 48절에 보면 내 믿음이 너희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도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누가복음 18장에서도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적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12:33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기적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오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놀라운 기적, 그 자 체를 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기적의 의미를 깨닫는 말씀 가운데 온전한 믿음을 세우는 신앙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놀라운 그 기적의 의미를 설명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들이 무지한 가운데 생명의 주 되신 예수님을 죽였지만 지금이라도 돌아온다면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용서하실 것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분도 다
13:23
앞으로도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하면은 새롭게 회복되는 것이 임할 것이다라고 약속합니다.
성경에서 회개, 돌이힘, 회복은 다 같은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슈브라고 합니다. 우리 중요한 단어인데 함께 말해보겠습니다.
슈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고 그 결과는 새롭게 회복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회개, 돌이힘, 회복 영어로 하면 모두 다 a로 시작합니다.
회계는 리펜트이고 돌이키는 건 리토론이고 회복은 리스토입니다.
이 모든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한마디로 죄로 인해서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선포했던 회개의 메시지였습니다.
회개는 내 안에 있는 그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인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 죄를 깨달은 사람은 죄의 길에서 돌이키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죄를 깨달았는데
14:36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그 사람은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돌이키는 것. 방향의 전환에 있습니다.
실제로 주의 길을 떠나지 않는 것은 아직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악한 길에서 떠날 때 하나님께서 그 죄를 사하시겠다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역대야 7장 14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5:14
사고 그들의 땅을 다 여기에서 떠나자라는 동사가 히브리어와 주니 회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이 회개입니다.
잘못했습니다.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기 위해서 베드로는 회개하고 돌이키라라고 선포했습니다.
돌이힘이 없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 영국의 저명한 기독교 사상가 세스 루이스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지옥으로 향하는 길은 결코 벼랑길이 아니고 밋밋한 내리막길이다.
사람들은 그 길을 기분 좋게 걸어간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얼마나 우리에게 매력적일 수 있는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이 갑자기 추락하는 벼랑길이 아닙니다.
아주 편안하게 걸어갈 수 있는 밋밋한 내리막길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기분 좋게 편안하게 걸어갑니다.
그런데 그 길의 끝에는 사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16:28
아담의 죄로 인해서 타락한 인간에게는 죄를 즐기는 성향이 생겼습니다.
사실은 그 죄가 나를 해치고 그 죄가 나를 파괴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는 어떤 유혹과 흥분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습관 중에서 건강에 안 좋은 걸 뻔히 알면서도 끊을 수 없는 유혹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왜 맛있는 음식은 다 몸에 나쁠까, 왜 몸에 좋은 음식은 맛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해본 적 없으십니까? 맛있는 음식, 기름지고 달달한 음식은 대부분 몸에 안 좋습니다.
그런 음식을 마음놓고 먹다 보면 건강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범어교회 이진은 목사님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우리 교회와 범어교회가 함께 로잔데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스토어 후원도 함께 하고, 또 3월달에는 헌혈 운동도 함께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17:31
가까이 있는 교회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동역하는 모델을 세워가고자 함께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지윤 목사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목사님이 저에게 그러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너무 부럽습니다. 제가 놀라서 뭐가 부러우신데요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봉신교회 앞에 위안이 있으니까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말씀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참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이진 목사님께서 중국 음식을 엄청 좋아하신다고 합니다.
법무 교회 근처에는 식당이 없는데 동신교회 앞에서 리안이 있으니까 부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국 음식이 기름기법 맛있죠 근데 맛있다고 매일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건강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왜 맛있는 음식은 몸에 나쁠까요?
저는 인간이 타락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몸에 좋은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아담의 죄로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의 입맛까지도 변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18:40
성경에 나온 것은 아니고 저의 매피셜입니다.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먹고 싶은 대로 먹지 않습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먹고 싶은 유혹을 참고 절제합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도 이러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방탕하게 살다 보면 내 영혼이 병들고 아프게 됩니다.
죄가 주는 그 쾌락을 즐기면서 기분 좋게 살다 보면 머지 않아 영혼의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주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에 머물지 말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로 돌아와야 합니다.
회계에는 반드시 방향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죄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서 내가 했으니까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큰 착각입니다.
주의 길을 떠나는 방향의 전환이 필요한데 그때 그 결과로 우리는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복의 과정이 불펜 리트 리스토. 이것이 논리적인 순서이기도 하고 시간적인 순서이기도 합니다.
19:49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회개했는데 왜 내 안에 변화가 없고 회복이 없는지 의아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펜드 이후에 곧바로 리스토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에 위트론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주의 길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그 리턴이 있어야지 그때 회복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실 때에 그 길로 돌이켜서 진정한 회복을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킬 때 진정한 변화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고 베드로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구약 선지서에서도 보면 이스라엘이 죄에서 돌아오면 그들을 회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예라기야 15장 19절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
20:57
한글 성경에는 이 평행법이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는데 영어 성경에는 아주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돌아오면 내가 너를 회복하겠다. 리터런이 있으면 리스토어가 있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돌아오다와 회복하다가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입니다.
슈브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가면 주님께서도 우리에게로 돌아오십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회개라고 부른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오시는 것을 회복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회개와 회복을 똑같은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회복되고 우리 영혼이 회복되는 것은 회개의 결과입니다.
회개하면 주님을 향해서 돌이키게 되고 주님께로 돌아오면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51편에서 이 사진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집에는 다윗이 범죄한 이후에 드리는 회개의 기도입니다.
다윗이 자기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향해서 마음을 다시 돌이켰습니다.
22:05
주님께로 돌아왔을 때에 그는 영적인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시편 51편 12절에 보니까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여기서 회복하다가 또한 히브리어로 슈고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고 회복되는 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회복의 과정입니다.
펜 리트 리스토어가 바로 영적 회복의 과정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선포한 회개의 메시지였습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 보면 돌이켜서 회개할 때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에서 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새롭게 된다. 그것이 주 앞에서 읽는다고 하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FRD 프레젠서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로부터 그 새롭게 되는 은혜가 온다. 바른 번역을 보면 주님의 얼굴로부터 그것이 이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는 힘은 주님의 임재, 주님의 얼굴로부터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힘들 때에
23:12
누구에게 가서 위로를 받으십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내 힘으로 안 되는 일을 만날 때에 여러분은 어디에서 소망을 거두십니까?
우리 마음에 힘이 없는 이유는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 15절에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생명의 주를 헬라 원어로 보면 생명의 근원입니다.
솔로라이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금방 힘을 잃고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스위스에서 전기 훈련을 받을 때 아름다운 들판을 산책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스위스는 전 국토를 공원처럼 아름답게 잘 가꿔 놓았습니다.
들판을 산책하다가 예쁜 들꽃을 보고 한송이 꺾었습니다.
그 숙소에 가져와서 꽃병에 꽂아두었는데 다음 날 어떻게 되었을까요?
완전히 시들어버렸습니다. 들꽃은 버리지 이 되더라고요.
하룻밤 만에 완전히 시들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니까
24:20
아무리 화려하고 예뻐도 하루 만에 시들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고 근사해 보이고 내면에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무슨 걱정이 있을까 싶은 사람에게도 각자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다양한 나라에서 수많은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모두가 다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로 인해서 생명의 근원 대신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오라 그러면 주님의 임재로부터 새롭게 되는 그 회복이 임할 것이다.
약속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이기는 힘은 우리의 의지력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지력은 무한하지 않고 지극히 제한적이기 때문.
아침에는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가도 저녁이 되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느끼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25:26
그러므로 이 문제를 이기는 힘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나오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사랑만이 연약한 우리를 붙잡아주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25:56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변화와 회복의 시작인 줄로 믿습니다.
생명의 근원 되신 주님 안에 거함으로 인생의 문제를 이길 수 있는 그 마음의 힘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변화될 수 있는지,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만들 수 있는지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심리학 이론, 사회학 이론, 뇌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언제 어떻게 사람이 변화되는지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의지력에 관한 최신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의지력은 무안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제한된 의지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리더들은 사소한 일에 의지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스티브 잡스나 마스 저카버그 같은 사람은 매일 똑같은 옷을 입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떤 옷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같은 일에 신경을 쓰기에는 이들이 고민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27:06
세계적인 CEO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는 될 수 있는 한 결정하는 일을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뭘 먹고 뭘 입을지에 대해서 결정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정해야 할 다른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의지력이 제한되어 있다면 그것은 정말 중요한 일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작은 일에는 의지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 규칙적인 삶의 패턴을 세우는 것입니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식사 시간을 일정하게 하고 식단도 일정하게 하면 우리는 작은 일에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제한된 의지력을 잘 사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무너질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람직하지 않은 그 유혹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의지력이 필요하기 때문이.
28:09
그런데 우리의 음실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버티다가 결국에는 그 유혹에 넘어가고 맙니다.
비츠버그 대학의 브라이언 바라 교수에 따르면 잠재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유혹을 이기는 특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들은 바람직하지 않은 유혹을 느끼는 상황 그 자체를 만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에게 유혹이 될 만한 상황 자체를 아예 피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술을 끊기 원하는 사람은 술 친구를 끊어야 합니다.
술 마시지 않고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교회에서는 다양한 문화 대학 강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음악, 미술, 꽃꽂이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야구, 축구, 자전거, 사진 등 다양한 전도대도 있습니다.
술 없이도 얼마든지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습니다.
유혹을 이는 최고의 방법은 유혹을 느낄 만한 상황을 아예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29:13
이것이 바로 요셉이 성적인 유혹을 이겼던 방법이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그때 요셉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 이러면 안 된다고 말했을까요?
창세기 39장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의
29:44
요셉이 오유다의 아내와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유혹을 이기는 최고의 방법은 유혹을 느낄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유혹을 바라보는 이 유혹을 이겨야 돼라고 노력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처음에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의지력이 다 소진되면 금방 유혹에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제를 회귀하는 사람은 유혹에 저항하거나 투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혹 그 자체를 피하고 유혹을 잊게 만들 만큼 아름답고 귀한 것을 더 생각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인생의 모든 순간에 예수님을 의식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 최고의 대안입니다.
제자로의 핵심은 금욕주의적인 삶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보디바의 방면을 보면서 그는 유혹을 이기려고 노력하지 않아 오히려 그는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창세기 39장 9절에 보니까
30:55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니까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와 동침한다면 보디발에게 죄를 짓는 건데, 요셉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였었기 때문에 그 유혹을 피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은 매일 매 순간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십니다.
나의 모든 말을 듣고 계시고 나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질 상황을 아예 만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이 룰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부흥사였던 밀리글럼 목사님께서 1948년에 모데스토 메네스토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셨습니다.
좋은 스캔들 사역 결과에 대해서 순결함을 지키겠다는 성명서였습니다.
그 내용 중에 하나가 아내를 제외한 그 어떤 여성과도 단둘이 자동차에 타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수많은 미국인들이 유리기 목사님을 비우셨습니다.
32:04
아니 여성과 같이 차를 탄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그레이브랑은 끝까지 이것을 지켰고, 그 결과 마지막까지 스캔들이 없었습니다.
제 전공이 세계 기독교 역사입니다. 안타깝게도 세계 기독교에서 수많은 세계적인 부흥사들이 여러 가지 스캔들에 연루되었습니다.
하지만 거의 유일하게 빌리그란 목사님은 단 한 번도 성적인 스캔들에 휩싸이지 않았습니다.
이분이 특별해서 그랬을까요? 어떤 여성을 보아도 유혹에 빠지지 않는 놀라운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은 자신이 위협을 받을 만한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지 알았기 때문에 유혹받을 것 같은 상황 자체를 피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제력을 믿으십니까? 저는 저의 자제력을 믿지 않습니다.
유혹받을 상황이 있으면 어떻게 될지 우리 모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예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습니다.
33:09
유혹을 이기는 힘은 자제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유혹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나는 줄로 믿,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인생을 투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하루하루 고달프게 살아 매일 찾아오는 그 유혹을 참아야 하는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유혹에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감탄하다 보면 유혹에 빠질 만한 상황 자체를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 돌이힘, 회복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리펜 리트 스포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회복을 위한 결단, 회복을 위한 의지력은 내 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지력은 제한되어 있고 소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힘으로 회복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새롭게 되는 그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는 2024년 되시기를
34:25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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