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주일설교
딱 한 번의 죄는 없다
사도행전 5:1-11
우리는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지난 한 주간도 거룩하게 살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죄에는 의도적인 죄가 있고 우발적인 죄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해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계획된 범죄가 있는가 하면 해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지만 잘못해서 이제 상해를 입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반 사회법에서 계획된 범죄와 우발적인 범죄를 구분합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도 의도적인 죄와 우발적인 죄를 구분하십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대부분 이것이 우발적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지 정상 참작이 되어서 벌을 적게 받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돈을 많이 주고 변호사를 고용하는 이유도 그러한 법적 논리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 마음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한 잘못 중에서 정말로 우발적인 잘못은 얼마나 될까요?
이것이 잘못인지 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인지 알고 있지만 그렇게 행동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의식적인 죄이고 의도적인 죄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잘못인지도 아는데 왜 우리는 그러한 행동을 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이것일 것입니다.
이번에 딱 한 번만 하고 그만하자.
잘못인지 알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어 딱 마지막으로 이번만 하고 이다음부터는 안 할 거야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수 있을까요?
딱 한 번만 하고 이제 안 할 것이라는 다짐이 잘 지켜질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1. 정직한 역사가의 기술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려고 했다가 즉각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내용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초대교회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굳이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있어야 할까? 은혜롭지 못한 이야기 좀 빼고 좋은 이야기만 성경에 있으면 안 되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순종한 사람은 그에 따르는 복을 받게 되고, 거역한 사람은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또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정직한 역사가였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에 있었던 좋은 일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사도행전에 기록하되 있는 모습 그대로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누가가 쓴 책이 두 권 있습니다.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누가 복음은 1권과 같고,
사도행전은 제2권과 같습니다.
우리가 시리즈 책은 함께 읽어야하는 것처럼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은 함께 읽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 복음을 시작하면서 저자는 어떠한 마음으로 이 책을 기록했는지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절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 구속사와 초대교회 역사를 기술하는데 그
근원부터 자세하게 살펴서 기록하겠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인베스트 게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어떤 사건을 조사하고 마치 수사하듯이 아주 자세하게 살피겠다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는 정직해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가진 사람은 좋은 역사가가 아닙니다.
좋은 역사가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해석한 자료에 의존하면 안 됩니다. 본인이 직접 1차 자료 프라이머리 소스를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제가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서도 1차 자료 수집을 많이 했습니다. 미국에서도 하고, 영국에서도 하고 심지어 우간다에까지 제가 리서치 여행을 가서 해외에 왔습니다. 다른 사람이 인용한 그 자료가 정확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직접 가서 1차 자료를 보고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가의 태도입니다.
저는 설교 시간에 출처가 불분명한 자료를 인용하지 않습니다. 인터넷에 있는 자료는 팩트 체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영어로 된 원본 자료를 확인하고 그다음에 인용합니다. 정확한 사실관계를 전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역사가로서 지양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과거를 낭만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과거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이 지금보다는 살기 더 좋았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막상 그때 그 시절 사진을 보여주면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1980년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겠죠. 1980년대에는 시내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죠.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는 회사에서 식당에서 여성에 대한 희롱이 많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여성에게 말 한마디 잘못해도 성희롱으로 고소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는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여러 가지 희롱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과거를 낭만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누가는 아주 정직한 역사가였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영광과 승리만을 기술하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초대교회 안에도 죄악이 있고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초대교회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접근을 막아주고자 한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19세기에 회복주의 운동이라는 운동 기존 교회들이 다 타락했다고 비판하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
언뜻 들으면 맞는 이야기 같죠. 하지만 문제가 좀 많이 있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지난 2천년 동안 교회에 있었던 모든 신학을 다 부정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 칼게돈 공의회의 결정이 다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공의회의 신학이 교회를 변질시켰기 때문에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단순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했던 회복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그룹이 있는데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 교회였습니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복잡한 거 다 중요하지 않고 그냥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가장 완벽했던 초대교회로 돌아가서 그 모습 그대로 신앙생활하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역사를 낭만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형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가 완벽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초대교회 안에도 범죄가 있었습니다.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했던 초대교회 안에도 연약함이 있고 죄악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구상에서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대구동신교회가 참 좋은 교회이지만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도 연약함이 있고 부족함이 있습니다. 심지어 존파이퍼 목사님의 교회에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저의 얘기가 아니라 그 교회 사역자로부터 직접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3차 로잔대회의 강사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메시지를 주셨던 분이 존 파이퍼 목사님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그분의 설교가 제 인생 설교. 마침 제가 그 로잔대회에서 그 교회에서 사역하는 사역자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분께 이야기했죠. 존 파이퍼 목사님 설교를 매주 들을 수 있으니까 너무너무 부럽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미국 분께서 말씀하기를 우리 교회에도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 교회에도 문제가 많다면 전 세계 어느 교회에든지 문제가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이죠. 우리 인생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결혼 생활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가정에도 각자 그 나름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이 모인 모든 공동체는 불완전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도 불완전하고 동신교회도 불완전하고, 존 파이퍼 목사님의 교회도 불완전합니다.
Leonard Cohen 캐나다의 시인이자 싱어송 라이터인 레나드 코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것에는 빈틈이 있다. 그 빈틈으로 빛이 들어온다
모든 인생에는 틈이 있죠. 그것을 보면서 우리가 절망하거나 좌절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빈틈을 통해서 주님의 빛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와 주권이 더욱더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에 좌절하지 마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아나니아의 죄는 구약에 나오는 한 사건과 아주 긴밀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친 것 중에서 자신의 것을 일부를 감춘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1절 2절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여기에서 감추다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노스피즈인데 아주 특이한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은 단어 인데 사도행전 이외에 이제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 70인경에 아주 중요한 구절에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수아 7장 1절에 보니까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갔다라
고 할 때 그때 노스피저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여리고성을 함락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파괴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헤렘이라는 개념으로 가나에 있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전쟁에서는 전리품을 가질 수 있었지만 열리고 전쟁에서는 그 모든 것을 다 파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그 물건 중에 일부를 자기를 위해서 취했습니다. 이 아가의 행동을 묘사했던 단어가 바로 노스피조라는 헬라어였습니다.
그와 동일한 단어가 아나니아의 행동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땅을 팔아서 일부를 취하고 나머지를 드리면서 마치 하나님께 전부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여리고성에서 하나님께 바친 그 물건을 취하는 아간의 모습과 동일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아간과 아나니아의 공통점이 무엇이었을까요?
2. 성령을 기만한 죄
그 땅을 팔아서 일부를 취한 것과 여리고성에서 금과 음을 취한 것의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 4절 말씀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내 땅이 아니며 판 이에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내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의 죄는 하나님을 속인 것이었습니다.
땅을 팔아서 일부를 바치면서 마치 전부를 바친 것처럼 거짓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사도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것이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거짓말은 큰 잘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 중에서 하도 거짓말하는 사람이 많아서 이제는 뭐 별로 놀랍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 미국 사회에서 거짓말은 정말 큰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만약에 친구끼리 말싸움하다가 너 거짓말쟁이야 유라이어 하면 큰 싸움이 납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는 말이기 때문이죠. 이 정도로 미국 사회에서 거짓말은 큰 잘못입니다. 예전에 빌 클린턴 대통령이 백악관 인턴 르윈스키와 스캔들이 났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성추문이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죠. 그런데 성추문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사회에서 공인이 그것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클랭턴은 탄핵당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이제 상원 의원에서 기각되어서 위기를 넘겼습니다.
사람에게 거짓말하는 것도 이 정도로 큰 문제라면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은 얼마나 더 큰 문제일까요?
과연 어떤 사람이 어떤 정신으로 하나님을 속이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전능자로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분으로 믿는 사람은 감히 하나님을 속이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감히 하나님을 속이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전능자로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교회라고 생각했던 초대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전능자로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시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감히 우리가 하나님을 속이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왜 이러한 행동을 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 3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내 마음에 가득하여 내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아나니아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가 성령을 속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였습니다. 성령 안에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복음을 증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멤버 중에 한 사람은 마음에 사탄이 가득했습니다. 사도행전 전체에서 사탄이란 단어가 딱 두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중에 첫 번째가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아나니아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했다고 말씀합니다. 저도 에서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을 함께 읽으면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사탄이 어떤 사람의 마음에 들어간 장면이 나옵니다. 누구일까요?
누가복음 22장 3절 열둘 중에 하나인 가롯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가롯 유다에게도 사탄이 들어가고, 아나니아의 마음에도 사탄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두 사람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롯유다는 제자들 중에서 돈 교회를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교회를 잘 관리한 것이 아니라 그가 거기에서 돈을 훔쳤습니다. 아나니아는 땅을 팔아 바치면서 일부를 챙겼습니다. 그리고 마치 전체를 바치는 것처럼 사도들을 속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에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과 돈은 명확하게 대비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돈은 눈에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돈을 믿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좋은 역사가는 낭만주의적인 해석을 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죠.
2천년 전 사람이나 지금 우리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돈이 필요한 것처럼 2천년 전의 사람도 똑같이 돈이 필요했습니다. 인생을 살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저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이러한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돈을사용해야지 돈을 섬기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돈에는 신기한 속성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모든 욕구에는 만족의 지점이 있습니다.
식욕, 성욕, 수면욕에는 만족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맛있게 식사를 마친 사람이 더 이상 먹고 싶은 욕구가 없습니다. 어젯밤에 10시간 자고 일어난 사람이 더 이상 자고 싶은 욕구가 없습니다.
그런데 돈은 다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도 거기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회초년생이 1억을 모으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을 하겠죠. 그러다가 1억을 모으면은 거기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10억을 모으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절대 만족할 수 없는 것이 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섬기면 안 된다. shoud not이 아니라 동시에 섬길 수 없다. can not 그것이 불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돈 둘 중에 한 가지만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섬기고 계십니까?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은행 통계로 2022년 우리나라의 1인당 GDP가 3만 3천 달러였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90년 우리나라 1인당 GDP가 6,600달러였습니다. 여러분 1990년이 그렇게 오래전이 아니죠. 그런데 그때보다 1인당 소득이 5배 늘었습니다.
소득이 늘어난 만큼 우리의 인생도 더 행복해졌을까요?
과거보다 훨씬 더 풍족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그만큼 우리 가족은 더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까요?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작가 중에 존 그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2006년에 이 사람은 미국 도서관 협회에서 우수한 청소년 문학 작품을 수상하는 마이클 프린츠상을 수상하면서 미국 문학계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존 그린의 소설 중에
존 그린,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어떤 여행자들은 암스텔감을 죄악의 도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곳은 자유의 도시이다. 그리고 자유로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악을 찾는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암스트드함은 네덜란드의 수도이죠. 네덜란드는 전 세계에서 최초로 2001년도에 동성 결혼과 안락사를 합법화한 곳입니다. 매춘, 마약, 동성애 등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합법화된 것이 암스트레드함입니다. 그곳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입니다.
사람들은 가장 자유로울 때 가장 많은 죄를 짓게 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유를 원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내 마음대로 살아갈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날개를 잃어버린 새와 같습니다. 날개를 잃어버린 새에게는 하늘을 날 자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은 선을 행할 자유를 상실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질수록 더 많은 죄악을 짓게 되는 딱한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안에도 죄악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조금 엄격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나니아가 그 정도로 큰 잘못을 했는가?
신앙생활하다 보면 거짓말 좀 할 수도 있지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심판하는 것은 너무 과도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러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조금 과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제가 사실 오늘 설교 제목을 죄는 바퀴벌레와 같다 라고 하려고 했습니다.
3. 죄는 바퀴벌레와 같다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아무리 그래도 설교 제목에 바퀴벌레가 들어간 것은 아닐 것 같다고 해서 딱 한 번의 죄는 없다라고 바꾸었습니다.
사실 저희 가족에게는 바퀴벌레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보르디에 처음 정착해서 살던 그 집에 바퀴벌레가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희는 제가 사역하던 부룬디 국제대학에서 마련해 주신 게스트하우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 주방에 가면 오랫동안 사용했던 냉장고와 전자레인지가 있었는데 문제는 냉장고와 전자레인지 안에 바퀴벌레가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냉장고 문을 열면은 바퀴벌레가 싹 지나갔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죠. 전자레인지 앞문에 바퀴벌레가 끼어 있어서 음식을 돌리면 바퀴벌레가 같이 보였습니다. 제 아내가 벌레를 싫어했기 때문에 주방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너무 싫어했습니다. 냉장고 문 열 때마다 바퀴벌레 볼까 봐 항상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저에게 부탁했습니다. 냉장고를 새로 사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니 멀쩡한 냉장고가 있는데 바퀴벌레 때문에 새 냉장고를 사는 것이 선교사에게 합당하냐고 제가 따졌습니다. 부부 싸움 했겠죠. 비장한 마음으로 선교지에 도착했는데 저희의 첫 번째 난관은 냉장고 안에 살고 있던 바퀴벌레였습니다.
이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씀드리면 재밌을 텐데 오늘 설교 내용과 연관이 적기 때문에 나중에 금요 기폭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집에서 바퀴벌레를 발견하면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바퀴벌레 한 마리지만 최소한 100마리 이상이 살고 있다는 뜻이지 눈에 보이는 바퀴벌레가 무서운 게 보이지 않지만 이런 벌레 엄청 많고 많은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어떤 사람의 죄가 눈에 보였다 하는 것은 그 전에 수백 가지 죄악 눈에 보이지 않는 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문에서 가끔씩 저렇게 훌륭한 분이 이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그전에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범죄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멀쩡한 사람이 누군가를 살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우리가 화가 나도 누군가를 죽일 수가 없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전에 수많은 단계의 폭력을 행해야 합니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을 멈추지 않을 때 그 끝에 가서 누군가를 살인할 수 있습니다.
성추문도 마찬가지죠. 여러분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잠자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그전에 수많은 스킨십의 단계가 있고 그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 갔을 때 마침내 끝에 가서 성추문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그 마지막 단계에서만 그 죄를 보게 됩니다.
중간에 있었던 수많은 단계의 죄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다가 마지막에 드러난 그 주 한 가지만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어느 날 우발적으로 저지른 죄가 아니라 그 죄를 하기까지 죄로 보이지 않게 행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등장 인물의 인생 전체를 다 기술하지 않습니다. 그럴 시간도 없고 성경 안에 그럴 공간도 부족하기 때문이지 가장 대표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 사람 전체의 인생과 신앙을 특징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예를 들어서 다윗왕 시대에 언약교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때 그 수레를 실었던 언약계가 언약계를 실은 두수레가 흔들렸습니다. 그때 이제 우사라는 사람이 언약계를 붙잡았는데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즉시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사무엘 6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우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그의 곁에서 죽으니라.
이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 너무하신 것 아닌가? 아니 언약계가 흔들렸으면 붙잡을 수도 있어 그거 잘못하고 어떻게 사람을 그 자리에서 죽일 수가 있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 성서의 모든 기구는 아론의 후손만 만질 수 있었습니다.
민수기 4장 15절 그러나 성들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라
고 주님께서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고핫 자손 아론의 직계 후손만 성문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21세기에 사니까 잘 모를 수 있죠. 하지만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아론의 직계 후손만 언약계를 만질 수 있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 만지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웃사는 아론의 후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언약계를 만졌습니다. 이것이 우발적인 행동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언약계를 만진 그 웃사의 행동 안에는 그동안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온 그의 신앙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단 한 번의 실수를 가지고 사람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오랫동안 참으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성경에 계시한 하나님의 성품은 참고 참고 길이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악을 멈추지 않을 때 마침내 주인은 언젠가 공의로운 심판을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아나니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나니아가 딱 한 번 잘못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잘못을 심판하신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그 죄를 짓기 전에 이미 수많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죄를 지었습니다.
바퀴벌레 한 마리가 눈에 보이면 이미 수백 마리가 있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 죄를 참고 참고 또 참으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인정하지 않는 자를 심판하심으로써 초대교회의 거룩함과 온전함을 지키셨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행하신 일을 듣고 온 교회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라는 단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것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단지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정의와 사랑의 공동체
예수님은 머리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머리로 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주권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사역은 주님의 거룩한 뜻과 성품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좋은 게 좋은 거지
여러분 좋은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온 교회에 큰 두려움이 있었다라는 말씀으로 마칩니다.
과연 오늘날 교회에 두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두려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하는 그 두려움이 오늘날 교회에 있을까요?
교회가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교회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 어떤 교회는 반려동물 예배실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교회 안에 흡연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흡연자도 예배 전후에 편하게 담배 피우고 와서 예배드리라는 거죠. 제가 흡연자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가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는지 말씀드립니다.
교회는 교회 다워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성도는 성도다워야 합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회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전 그분을 만홀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않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갈라디아서에 나와 있습니다.
갈 6장 7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아나니아는 하나님을 업신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도 없고, 우리 자신도 속이면 안 됩니다.
무엇으로 심든지 간에 심은 그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줄로 믿습니다.
딱 한 번의 죄는 없습니다.
한 번의 죄는 그다음으로 이어지고 그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우리는 그 죄의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주님 안에서 진정한 회복과 변화를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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