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노트

2023-03-12 (주일)ㅣ대구동신교회 주일설교ㅣ내 마음의 그늘 (2) 시기ㅣ사무엘상 18절 6-9절ㅣ문대원 목사

by kwangs 2023. 3. 13.
반응형
SMALL

https://www.youtube.com/watch?v=qe_NaQG6lng 

 

여러분은 누군가를 부러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학창시절에는 나보다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는 친구를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취업할 때에는 나보다 더 연봉이 많은 그런 좋은 회사의 취직한 친구를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게 되면 아들 있는 사람은 딸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고 딸 가진 사람은 아들 있는 사람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혹시 아들과 딸 모두를 가지신 분이 계시다면 성공하신 분들입니다.

내가 갖지 못하는 것을 가진 사람을 보면서 부러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없는 것을 내 친구가 가졌다면 부러울 수 있습니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이라는 유명한 시를 썼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을날 숲속길에 산책하다가 두 갈래 길을 만났습니다.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선택했다는 내용의 시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고민을 해본 적이 있으시지요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두 갈래 길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아 마음 같아서는 두 가지 모두 다 선택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 고민 끝에 한 가지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길로 가면서 뭐 좋은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켠에는 아 내가 다른 길로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그 길로 갔던 친구를 보면서 부러워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친구의 성공 행복 기쁨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질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부러움과 질투가 지나치면 시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부러워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시기는 죄입니다.

고린도전서 3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나이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아멘 시기는 육신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에 속했다는 것은이 세상을 따라가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가는 경우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시기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인 르네즈 라르는 시기를 설명하면서 모방 욕구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가까운 친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도 가지고 싶은 그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모방 욕구입니다.

문제는이 모방 욕구가 과도한 경쟁이나 갈등을 초래하고 또 시기심을 초래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념으로 가득찬 방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방으로 어린 아이들을 한 명씩 한 명씩 들여 버렸습니다.

첫 번째 아이가 그 방에 들어가서 많은 인형들을 훑어보고서는 하얀색 곰돌이 인형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형을 가지고 즐겁게 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이가 들어왔습니다.

두 번째 아이 역시 수많은 그 인형들을 보고 있지만 그 아이가 원하는 인형은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 아이가 가진 그 하얀색 곰돌이 인형을 갖기를 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가 첫 번째 친구가 그 인형을 가지고 재미있게 노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모방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이 아이들에게만 모방 욕구가 있을까요 여러분들에게는 모방욕구가 없습니까?

여러분 친구를 보면서 아 저 친구가 가진 저것을 내가 가지면 나도 행복할 텐데 아 나도 저런 집 나도 저런 배우자가 있으면 너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이것이 바로 시기에 시작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시기가 얼마나 위험하고 파괴적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은 골리앗을 무찌른 다윗과 함께 수도인 그 기부하로 돌아왔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사울과 다윗을 향해서 여인들이 춤추고 노래하면서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과거에 홍해에서 애굽 군대를 무찔렀을 때 미리암과 여인들이 그렇게 승전가를 불렀습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에서는 큰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그 영웅들을 높이는 노래를 만들어서 불렀습니다.

그 여인들이 사울과 다윗의 그 승리를 축하하면서 부른 노래가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상 18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히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아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히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이 노래가 사울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역사의 중심에 서길 원했고 모든 집중을 자기가 받기 원했습니다.

그런데이 여인들이 감히 사울보다 다윗을 더 높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이 노래는 히브리시의 평행법을 사용한 노래입니다.

히브리 시에는 평행법이라는 문학적인 장치가 있는데 첫 행의 사용된 것과 비슷한 개념의 단어를 두 번째 행해도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그 의미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행법은요 그 단어를 있는 그대로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도 그 평행 관계에 있는 단어가 강조하는 그 이미지와 상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시편의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917절 함께 읽겠습니다.

참병이 내 왼쪽에서 만명이 내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이 재앙이 내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아멘이 말씀은 실제로 천명이 내 왼쪽에 있고 실제 오른쪽에서 내 만 명이 엎드려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명 만명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엎드러지지만이 재앙이 나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사용된 천명과 만명은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히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할 때 실제로 사울이 천명을 죽이고 다윗이 만명을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마주 많은 사람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사실 고대 전쟁에서는 한 명이 천명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요즘처럼 총으로 전쟁을 해도 한 사람이 천명을 죽일 수가 없는데 고대 사회에서 칼과 창으로 가까이에서 전쟁을 하는데 한 사람이 천명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의 부른 노래는 실제로 사울이 천명 다윗이 만명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울과 다윗이 함께 어마어마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높인 것입니다.

당연히 사울도 히브리 사람이었기 때문에이 히브리시의 평행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천명 만명이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인 것은 왜 나는 천명이고 다윗은 만 명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만약에 양심이 있었으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이 등장했을 때 이스라엘 병사들은 다 사기를 잃고 무서워서 두려워 떨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자신도 골리앗과 싸울 용기가 없었는데 어린 소년 다윗이 용기있게 나가서 거대한 장수를 무찔렀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대적을 무찔렀으니까이 순간만큼은 다윗이 칭찬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이 순간에 여인들이 다윗을 높인 것에 대해서 불평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이 상황을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전쟁은 조금 잔인하니깐 스포츠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선수가 손흥민 선수이죠 영국 토트넘이라는 팀에서 뛰고 있습니다.

그 팀에는 유전공격수가 두 명인데 손흥민 선수가 있고 해리 케인이 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은 알겠지만 해리 케인이란 선수는 잉글랜드 국가대표의 주장입니다.

그 선수는 프리미어리그에서 200 한 골을 넣었구요 손흥민 선수는 99골을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보면 누가 봐도 해리 케인이 훨씬 더 훌륭한 선수가 맞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기에서 손흥민 선수가 hatch 선수는 손흥민 선수가 됩니다 커리어 전체를 놓고 보면 해리 케인이 훨씬 더 훌륭한 선수이지만 최소한 그 경기만 놓고 보면 손흥민 선수가 최우수 선수가 맞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이 그런 상황입니다.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히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할 때에는 다윗이 사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이 순간만큼은이 전쟁 만큼은 더 큰 공이 다윗에게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골리앗을 물리친 것이 다윗이니까 이것은 아주 합리적이고 타당한 말입니다.

그런데 사울은이 노래를 듣고서도 마음이 불쾌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내가 이스라엘 왕인데 모든 영광과 찬사를 다 내가 받아야 하는데 감히 여인들의이 다윗에게 나의 찬사를 돌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친구가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어떻게 말해 주겠습니까?

우리 팀 선수가 잘해서 승리했으면 함께 기뻐하면 될 것인데 왜 우리 팀 선수 잘한 것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못난 행동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울이 했던 행동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시기하는 것은요 보기에 흉한 것입니다.

시기하는 사람 질투하는 사람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으면요 참 마음이 딱합니다 안 됐습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축하해 주지 못하는 그 마음은 너무나 고약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여인들의 노래를 듣고 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근데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했고 다윗을 향하여서는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무엘상 188절 함께 읽겠습니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여러분은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아니 여인들이 지금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을 높이고 있는데 왜 사울은 그 앞에서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라고 말했을까요 4월 마음속에 있는 불안과 염려가 혹시 느껴지십니까 아 갑자기이 사람이 부상에서 내 나라를 빼앗아가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사울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 이전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사울 왕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불순종했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의 왕권을 빼앗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서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528절 함께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아멘이 말을들은 이유로 사울은 불안과 염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주신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일까 이스라엘에서 조금이라도 주목을 받거나 떠오른 사람이 있으면 아마 사울은 그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혹시 저 사람이 아닐까 혹시 저 사람이 내 나라를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그 왕권을 잃을 것을 염려하면서 불안해 떨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매우 불안정한 사람이 되었고 시기와 질투가 많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이 다윗의 승리를 축하하는 높이는 그 여인들의 노래를 듣고 사울은이 다윗이 자신의 왕권을 빼앗아가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를 향해서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최악의 리더는 누구일까요? 

제가 학생 시절에 경험했던 최악의 리더는 불안정한 리더였습니다.

마음이 불안정하고 자존감이 낮은 리더가 제가 경험했던 최악의 리더였습니다.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은 변덕이 심합니다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도무지 그 사람의 기분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데 어제까지는 괜찮았다가 오늘은 갑자기 화를냅니다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 어떤 때는 칭찬해주고 어떤 때는 분노를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떠한 장단에 맞춰서 일해야 할지 몰라서 함께 일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리더의 기본을 맞추기 위해서 애쓰다가 정작 일해야 하는 그 에너지를 다 소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은 일관성이 없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사람은 관 조직의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부모로서 일관성이 없으면 우리 자녀의 마음에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어떤 때는 괜찮다고 했다가 어떤 때는 안 된다고 하면 자녀의 마음이 혼란스럽게 됩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우면 우리 자녀가 확신이 없고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고 그러는지 분명한 기준이 필요하고 일관성 있게 그 기준을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울은 최악의 리더였습니다.

마음이 불안정하고 자존감이 낮고 변덕이 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 누가 내 자리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에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나에게 위협이 된 사람이 있으면 바로 그 사람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와 비슷한 사람이 또 한 사람 나옵니다 바로 가인입니다.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였던 것은 그의 원수가 아니라 자기 동생이었습니다.

 

가인은 왜 자기 동생을 죽였을까요 창세기 445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재물을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몹시 분하면서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까요 바로 그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47절에 보니까 내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이 말은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와 예배자를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죄악을 행하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일입니다.

양심이 있으면 가인은 자기 잘못을 돌아보고 왜 그렇게 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에 그의 동생 아벨을 향한 시기와 분노를 가졌고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 그의 동생을 살인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벨은 선한 삶을 살았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고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으신 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분노의 휩싸인이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시기는 분노로 이어지고 분노는 살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가인의 경우에도 그랬고 사울의 경우에도 그랬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가인은 살인의 성공했고 사울은 살인의 실패했습니다.

다윗을 향한 시기와 분노를 가진 그 사울은요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왕궁에서 수금을 타고 있던 다윗에게 창을 던졌습니다.

무방비 상태에 있던 그 소년에게 두 번이나 창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두 번 모두 창을 피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죠 전쟁에능한 키 큰 장소가 창을 던졌는데 수금을 타고 있던 그 어린 소년이 두 번 다 피했기 때문입니다.

창을 던졌던 사울조차 이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고 계시는구나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8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아멘 이것은 사울에게 너무나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지키셨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성경 저자는 혹시라도 우리가이 사실을 놓칠까 봐 한 번 더 강조했습니다.

사무엘상 1829절 함께 읽겠습니다.

4월이 다윗을 더욱더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아멘 다윗은 사울을 배속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해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 일에 실패했고 그 결과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집에 가셔서 이번 주에 시간이 되실 때 사무엘상 18장 전체를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이 장애에서 반복되는 말씀이 하나 있는데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신다 하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보았습니다.

그 결과 온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도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도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오직 사울만 다윗을 미워했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전체 구조가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온 이스라엘은 다윗의 사랑하고 사울의 아들과 딸도 다윗을 사랑하는데 오직 사울만 다윗을 미워했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기에 본질입니다.

누군가를 시기하면 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못 봅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 칭찬하는 것을 못 봅니다 내 마음과 내 힘을 다해서 그 사람의 불행을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 신학자들은 시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슬퍼하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이다 너무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시기에 본질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슬퍼하는 것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 우리 안에 시기가 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시기하는 마음이 얼마나 해로운지 잠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언 1430절 함께 읽겠습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아멘 여러분 시기는 뼈를 썩게 합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망가뜨립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슬퍼하기 때문에 언제나 시기하는 사람은 외롭습니다.

잔칫집에 가서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시기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을 그렇게 살면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나중에 나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일이 이것입니다.

나에게 너무너무 좋은 일이 생겼는데 아무도 나를 축하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축하해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좋은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축하받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 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주십시오 여러분 슬픈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위로 받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이 힘들 때 진심으로 위로해 주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했던 그 행동을 잊지 않으십니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했던 그 행동을 잊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해준 것 진심으로 위로해준 것을 기억하고 나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힘든 일이 있을 때 똑같이 해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1215절 함께 읽겠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올라 아멘 이것은 상식 중에 상식입니다.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잘지 못하고 있습니까?

내 친구에게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해 주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시기는 다른 사람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망칩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슬퍼하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기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시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시기를 멈추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으로 우리가 기쁨을 느끼려고 한다면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얼마든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자랑하는 사람은 나보다 돈이 더 많은 사람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학벌 자랑하는 사람은 나보다 학벌 좋은 사람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 비교의식 경쟁의식 이것이 우리에게 좋은 자극이 되지 않을까요 동기부여가 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를 따라잡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은 인생의 초점이 다른 사람에게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그 나의 그 경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속도에 맞춰서 달려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의 재능과 그 사람의 환경은 나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람과 내가 달리는 속도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시기의 죄목으로 형벌을 받는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지상에 있을 때 내가지는 행복을 즐기기보다 다른 사람이 비통해 하는 것을 더 즐겼습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시기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그 행복을 즐기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많은 복과 은혜를 주셨는지 헤아리지 못합니다 시기하는 사람은 온통 다른 사람에게 집중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신경 쓰느라 정작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복은 헤아리고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사람은 내가 받은 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은 있는데 나에게 없는 것을 보면서 불평하고 원망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적인 음악과 모차르트와 살리엘리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아마데우스라는 소설과 영화로도 제작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18세기 후반 유럽의 음악계를 대표하는이 두 사람은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궁정 작곡가 쌀리에리는 누구보다 음악의 열정적이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아무리 열심히 작곡해도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프시코드에 앉아서 즉흥적으로 곡을 연주하는 모차르트를 보면서 살레에 질투를 깊이 느꼈습니다.

아 왜 나에게는 저런 악상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면서 좌절하고 절망하고 원망했습니다.

저에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쳐서 음악을 전공할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에 저희 교회 지휘자께서 연세대학교 출신의 아주 젊은 음악가였는데 아 저를 보고 많이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 마음이 높아져서 마치 저에게 대단한 음악적인 재능이 있다고 제가 착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과 상의하고 기도하는 중에 음악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비전공자로서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제가 대학 시절에 선교단체 큰 예배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오디션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제 남자가 피아노를 치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그것도 상황이었는데 그날 키보드 연주자로 저와 어떤 다른 남학생 두 명이서 오디션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저희 교회 지휘자 분에게 말을 듣고 아 비전공자 중에서 나보다 반주를 잘하는 남자는 없을 거야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그 다른 남학생은 화학을 전공하는지 친구였는데 근데 그 친구가 저보다 피아노를 훨씬 더 잘 찾습니다.

아니 똑같은 남자애고 똑같은 비전공자인데 저보다 피아노를 훨씬 더 잘 치는 그 사람 만나니까 제가 얼마나 좌절하고 위축됐는지 모릅니다 오디션 결과는 두 사람 모두 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와 저는 동갑이었는데 그 이후에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한이 친구는 나중에 작곡가로 편입을 해서 음악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작곡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 미국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코리안 심포니의 상임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이 친구를 보면서 제가 한 가지 깨달은게 있습니다.

아이 세상에는 천재가 있구나 실제로 천재가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고 또 한가지 깨달았는데 천재랑은 경쟁하면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에는 천재가 있습니다.

천재라는 건 절대로 경쟁하면 안 돼요 그냥 놀랍다 감탄하고 박수 쳐 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그 천재적인 재능을 우리가 함께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친구를 통해서 저는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이 세상에는 우리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비교해서 나의 가치를 증명할 수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의 가치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이 394041번 교향곡입니다.

흔히 이것을 모차르트의 3대 교향곡이라고 부르는데이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몇 번일까요 이 질문을 잘못된 질문입니다.

394041번 다 모짜르트를 만들었으니까 그 모두 다 훌륭한 곡이죠 최고의 작곡가가 만들었기 때문에이 곡의 가치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술작품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가치와 다른 사람의 가치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의 가치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가치를 말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조던 피타스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날을 비교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비교해야 될 유일한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어제의 나입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얼마나 더 성숙하고 성장하고 발전했는지 돌아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부목사님 전도사님 당도사님들이 43명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로서 저는 이분들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가진 재능과 은사와 경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이분들의 과거의 모습과 오래 모습을 비교합니다 설교에 있어서 목양에 있어서 사역에 있어서 작년보다 올해 더 발전하기를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또한 저는 우리 교회를 다른 교회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교회가 처한 상황과 환경과 역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작년에 우리 교회보다 올해 우리 교회가 더 발전하기를 기도할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다른 사람의 자녀와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배우자를 다른 사람의 배우자와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년에 모습과 오래 모습을 비교하면 되는 것입니다.

장경과 비교했을 때 신앙적으로 더 성숙하고 어떤 현실적으로 더 발전했는가를 돌아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레인에서 뜁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뛰는지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나의 페이스대로 나에게 주어진 그 경주를 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그 자유를 누리면서 나에게 주어진 경주를 묵묵하게 뛰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본받아야 합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교만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교만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겸손의 왕으로이 땅에 오셔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낮아지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시기에 빠질 시간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낮추어서 섬기는 사람은 비교할 시간도 없고 시기에 빠질 시간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려고 싸웠습니다.

십자가를 지어 가시는 그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그 보좌 우편함 않겠다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렇게 다투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262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아멘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께서 섬기기 위해서이 땅에 오셨는데 왜 우리는 섬김을 받으려고 할까요 우리 주님은 목숨을 주기 위해이 땅에 오셨는데 왜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정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나의 욕망을 따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줄로 믿습니다.

학생 시절에 제가 청년부 회장으로 섬길 때 초신자가 등록을 해서 훈련을 받고 처음으로 임원이 되었습니다.

청년부 임원이 된 것을 너무 기뻐하면서 그 친구가 후배가 저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선배님 야 이제 저에게도 이런 권한이 생긴 것이지요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세상에선 어떤 자리로 올라가면 그만한 고난이 생기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그런 권한이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아 그래 너에게는 이제 섬겨야 하는 책임이 생긴 거야라고 답을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리더가 권한을 행사하지만 교회에서는 리더가 책임을집니다 세상에서는 큰 자가 섬김을 받지만 교회에서는 큰 자가 섬깁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높아지는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시기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는 그 욕망이 있기 때문에 시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본받을 때에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그 욕망이 사라지는 줄로 믿습니다.

자기를 미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그 예수님을 따라갈 때에 우리 마음의 시기도 사라지는 줄로 믿습니다.

시기의 길은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기 위해서 불안과 분노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족의 길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따라갈 때에 우리의 마음의 시기는 사라지는 줄로 믿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