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4 (주일)ㅣ대구동신교회 주일예배ㅣ성령과 함께 경계를 넘어서ㅣ사도행전 1장 6-11절ㅣ문대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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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6-11]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Acts 1:6-11, NLT] 6 So when the apostles were with Jesus, they kept asking him, "Lord, has the time come for you to free Israel and restore our kingdom?" 7 He replied, "The Father alone has the authority to set those dates and times, and they are not for you to know. 8 But you will receive power when the Holy Spirit comes upon you. And you will be my witnesses, telling people about me everywhere—in Jerusalem, throughout Judea, in Samaria, and to the ends of the earth." 9 After saying this, he was taken up into a cloud while they were watching, and they could no longer see him. 10 As they strained to see him rising into heaven, two white-robed men suddenly stood among them. 11 "Men of Galilee," they said, "why are you standing here staring into heaven? Jesus has been taken from you into heaven, but someday he will return from heaven in the same way you saw him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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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4 (주일)ㅣ대구동신교회 주일예배ㅣ
성령과 함께 경계를 넘어서ㅣ
사도행전 1장 6-11절
문대원 목사
2024년 9월에 한국에서 제4차 오전대회가 열립니다. 로잔대회는 복음주의 신학에 기반한 전 세계의 선교사들과 선교 단체들이 참여하는 자발적인 운동입니다.
4개의 키워드를 이해해야 합니다. 3개 복음주의 선교운동이라는 키워드입니다. 각각의 키워드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이에 대해서 작년 11월에 선교 헌신 예배 때 자세하게 설교를 드렸습니다. 혹시 궁금하신 분들은 교회 홈페이지에서 로잔대회의 역사와 의의라는 설교를 찾아서 들어보시면 되겠습니다. 로잔대회에서는 오전에 성경 강의 시간이 있습니다.
각 대륙에서 선정된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을 강의하는 시간입니다. 이번 대회의 성경 본문이 사도행전 말씀입니다. 그래서 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는 한국교회가 사도행전을 본문으로 함께 공동 설교를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온누리 교회, 지구촌 교회, 주안장로교회 등 대표적인 교회들이 함께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로잔 대회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로서 원래 사도행전을 본문으로 해서 주일 설교를 하고자 합니다. 우리 이웃 교회인 범어교회도 함께 사도행전 공동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동일한 본문으로 주일 설교를 하는 것은 아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100년 전에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기도와 말씀 가운데 부흥의 역사를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가 가능하다는 믿음입니다.
나는 교회가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가?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어떠한 소망도 말할 수 없습니다.
변화가 가능하다는 믿음 → 미래에 대한 소망
우리 인생 가운데 변화가 가능하다면 한국교회 안에서도 변화가 가능할 줄로 믿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소망 가운데 기도할 수 있고 소망 가운데 사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없는 사람은 소망이 없기 때문에 교회를 비난하고 비판하기에 바쁠 것입니다. 여러분 비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건설적인 비판, 정당한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다만 긍정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믿음 위에서 이러한 비판을 해야 합니다.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믿으면서 쏟아내는 비판은 대안이 없는 비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대안 없는 비판을 하는 것이지요. 최고의 학교, 최고의 회사, 최고의 교회를 향해서도 얼마든지 우리가 대안 없는 비판을 할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일이 대안 없는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 대안이 없는 비판은 아무 의미가 없고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하는 비판이 이러한 종류의 비판입니다.
누구에게나 한국 교회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를 보면서 100%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교회를 향해서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기 전에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교회가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가 하는 질문을 먼저 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건설적인 비판, 대안이 있는 비판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사람은 그저 비판을 위한 비판, 대안이 없는 비판을 할 뿐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건설적인 비판을 하고 대안이 있는 비판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위해서는 교회가 변화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우리 눈앞에 보이는 문제가 자명한데 변화가 가능하다는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1. 경계 안에 갇힌 사람들
오늘은 교회가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 사도행전 1장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큰 기쁨이었고 놀라움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의 부활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확실한 이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사도행전 1: 3
[행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Acts 1:3, NLT] During the forty days after he suffered and died, he appeared to the apostles from time to time, and he proved to them in many ways that he was actually alive. And he talked to them about the Kingdom of God.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확실한 증거를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영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육체를 가지고 부활한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몸을 만질 수가 있었고 예수님과 함께 식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위해서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 구원의 길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 구원의 길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이후 40일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동안 희미하게 이해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부활로 인해서 더욱더 확실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사도행전 1:6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6 So when the apostles were with Jesus, they kept asking him, "Lord, has the time come for you to free Israel and restore our kingdom?"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현세적인 나라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현세적인 관점을 넘어서지 못하는 제자를 바라보며 답답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들은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거동락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기적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이스라엘 나라로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경계 안에 갇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가족, 나의 민족, 나의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족 복 주시고 우리나라를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경계를 세워서 나를 보호하고 나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성향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을 좋아합니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누구나 다 조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그 공간을 안전지대 영어로 컴플존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그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정서적인 안정감을 느끼고 또한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안전지대를 떠나서 낯선 환경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다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은 한 달 살기가 유행이잖아요. 한 달 동안 유럽의 시골 마을에서 산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처음 며칠은 너무 좋을 것입니다. 유럽의 이국적 풍경도 너무 아름답고 바삭바삭한 바게트 빵도 맛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면 어떻게 될까요? 이국적인 풍경도 이제는 금방 식상하게 느껴집니다. 딱딱한 유럽 식빵이 아니라 김치찌개가 먹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을 살펴봐도 너무 유럽 시골이어서 한국 식당이 없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럴 때는 중국 식당을 찾으면 됩니다.
외국에 나가서 한국 식당 없으면 중국 식당 찾으면 되고, 중국 식당이 없으면은 타이 음식점, 태국 식당을 찾으면 됩니다. 웬만한 곳에는 중국 식당이나 태국 식당이 하나쯤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곳에라도 가서 우리의 마음의 정서를 풀 수 있습니다. 조금 우습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내가 자란 문화와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처음에는 좋을지 몰라도 금방 피로감을 느끼게 됩니다. 나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것 나의 정체성은 내가 자란 문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경계를 세우곤 합니다. 내 문화와 전통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경계를 세우는 왕국 vs 경계를 넘어가는 왕국
인류 역사에는 두 가지 종류의 왕국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경계를 세우는 바운더리 메이킹 왕국이 있었고요. 둘째는 경계를 넘어가는 바운더리 크로싱 왕국이 있었습니다. 전자의 예는 중국입니다.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아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자기 문화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물리적인 경계를 세웠습니다.
후자의 예는 로마 제국입니다. 로마 제국은 8만 km에 달하는 도로를 만들어서 유럽과 중동과 아프리카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통합했습니다.
포장 도로만 8만 km이고요. 비포장 도로까지 합하면 40만 km가 넘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총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202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총 길이가 5천 km입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은 2천년 전에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총 길이보다 16배가 많은 포장도로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닙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멸망했지만 로마가 남긴 문화와 전통, 법과 제도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남김 전통
달력, 도로, 상하수도, 사법제도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달력이 로마에서 왔습니다. 도로 시스템과 상하 수소 시스템도 로마에서 왔습니다. 우리나라 사법제도가 영미법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로마법에서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이 로마 가도를 따라서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로마 제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선교 사역을 펼쳤고, 그 대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를 따라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 결과 313년에는 기독교가 공인되었고, 380년에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경계를 세우는 왕국은 오래가지 못하지만 경계를 넘어가는 왕국은 역사에 길이 남는 문화와 전통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계를 넘어가기보다는 경계안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익숙한 곳, 나에게 편안한 곳에 정착해서 벽을 세우고 경계를 세웁니다. 나만의 집, 나만의 성을 세우고 그 안에서 평안하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던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태도를 책망하시면서 이스라엘보다 더 큰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경계를 넘어가라는 명령
문제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 성령이 임하셔야지 그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회복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까 그 부활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이 강성해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다분히 현세적인 꿈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실 이 질문은 이 대답은 제자들의 질문과 동떨어져 보입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해서 물었는데,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동문서답처럼 보이는 말씀이지만 사실 이것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아주 정확한 답변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살펴보면 그들이 가졌던 기대와 소망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표현에서 회복은 정치적인 독립을 뜻합니다.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력을 가지고 확실한 영토를 가진 나라가 되는 것을 한마디로 회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나라에는 민족주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야 자기들이 알아서 할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니까 유대인들만을 위한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기대와 염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표현 안에는 정치적인 나라, 민족주의적인 나라를 향한 기대와 염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말씀하시고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의 나라가 갖는 주권을 뜻합니다. 모든 나라가 주권을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군대의 힘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확장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1) 군사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확장
(2)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위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칼과 전쟁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자들의 증거를 통해서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상했던 나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나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민족주의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을 위한 유대인들만을 향한 유대인들이 특권을 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 세계 모든 민족을 위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를 다 언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소외되는 민족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21세기의 관점에서 이것은 당연한 일이죠. 우리가 어떻게 타고난 인종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거 잘못된 일입니다. 하지만 2천년 전에 이런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배 민족은 우월하고 피지배 민족은 열등하다는 생각
2천 년 전 갈 것도 없죠. 200년 전만 봐도 인종적인 차별이 있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부르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중국인들은 동서남북 사방에 있는 그 이민족들을 다 오랑캐라고 불렀죠. 동이남만, 서융, 북적이라는 그 표현에는 이민족을 비하하는 사상이 다 깔려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진족, 여진족, 일본 같은 이민족을 다 열등하게 여겼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이 민족을 다 열등하게 취급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우선이고 우리 민족이 최선이다, 최고다
라는 생각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민족적인 국가적인 경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개념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꿈꾸는 그 자들에게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개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경계를 넘어갈 수 없는 사람에게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어떠한 일을 하실까요?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고 말씀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John 14:26, NLT] But when the Father sends the Advocate as my representative—that is, the Holy Spirit—he will teach you everything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told you.
성령께서 임하시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지만 그 의미를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IQ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한된 인간의 생각으로 이성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그 이후에 영광에 들어간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당시에는 몰랐는데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가 어떤 의미인지 당시에는 몰랐는데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청교도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성령의 사역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청교도 신학자 제임스 패커 새 언약에서 성령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투광 조명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투광 조명이 무엇이냐면 건축물의 비추는 건축물을 향해서 나가는 조명입니다. 간접 조명이죠. 몇 달 전에 우리 교회가 이제 십자가 조명 공사를 하면서 간접 조명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랬더니 교회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밤에 본관 건물을 보면 건물을 비추는 투광 조명이 있어서 참 아름답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성령은 자기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임하실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줄 믿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바라보는 해석의 틀
인터프티 프레임웍을 강조합니다.
똑같은 역사적 사실을 보고서도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해석의 틀을 가지는 것이 역사학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전혀 다른 평가가 있습니다. 그분을 아주 좋게 평가하는 관점도 있지만 정반대의 평가도 있습니다. 어떻게 동일한 인물에 대해서 이렇게 다른 평가가 가능할까요?
역사를 바라본 해석의 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통계학자들이 통계를 왜곡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많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경제 성장률, 실업률 같은 통계를 왜곡해서 얼마든지 자기 주장에 맞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역사학자들 역시 얼마든지 역사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자기 주장에 맞게 자기 이데올로기에 맞게 왜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해석의 틀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올바른 해석의 틀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전통, 우리의 문화가 아닙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임하실 때 우리가 올바른 해석의 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 = power, miracle “기적적인 능력” 폭발적인 힘
또한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을 영어로 파워 혹은 미러클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 기적적인 능력을 뜻합니다. 헬러어러는 뉴라미스트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입니다.
다이너마이트가 쾅하고 폭발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임하실 때 그러한 폭발적인 힘과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것이지 성령의 능력이라는 표현이 사도행전 10장에서도 나옵니다.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폭발적인 힘과 에너지와 지치지 않는 열정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 목적은 사람을 살리고 키우고 고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은 예수님의 사역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아무리 낙담되는 일이 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힘을 성령께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셨다면 우리도 그 생명 사역을 이어가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이 능력을 체험하길 원하신다면 신년 기폭에 나오시면 됩니다.
- 지난주 신년 기폭에서 정말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 이인호 목사님께서 오셔서 평생 기도할 결심에 대해서 정말로 도전이 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버지 대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우리의 입술을 열어서 소리 내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환우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주에도 신년 기폭이 계속됩니다. 총신대학교 박성규 총장님께서 오셔서 귀한 말씀을 전해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이번 주에는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이 아니라 정말로 뜨거운 신앙을 회복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오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우리 마음 가운데 기쁨이 넘치고 기대와 소망이 넘칩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은 참 힘들고 벅찰 수 있습니다.
교회에 무슨 모임이 이렇게 많고 무슨 일이 이렇게 많은지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힘과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신앙생활을 하여서 진정한 기쁨과 보람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경계를 넘어가라는 명령
(2)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라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나타나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증인은 단순히 사실관계를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멀리서 관찰했던 내용, 어떤 사건을 진술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고 내가 직접 체험하는 개인적인 경험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 요즘은 인터넷에 이제 식당 후기가 많이 있죠.
- 사람들이 맛집 검색을 많이 하다 보니까 모든 식당마다 포털 사이트에 좋은 후기를 올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식당은 파워 블로거에게 돈을 주고 좋은 후기를 좀 써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반 손님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진짜 후기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정말 자기 돈으로 이 음식을 사 먹고 정직하게 쓴 후기인지 아니면 주인에게 돈을 받고서 일부러 좋게 써준 후기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돈으로 지불했다는 영수증이 있는 후기를 찾아서 정직한 평가를 찾고자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한 것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누구에게 돈을 받고 예수님을 증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직접 보고 직접 경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증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증거에는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 요즘 청년들이 우리 교회에서 결혼을 이제 많이 하기 때문에 매주 이제 많은 커플들이 와서 저에게 기도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 요즘은 사실 청년들이 결혼을 안 해서 문제라는데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 청년들은 결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결혼하는 커플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때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고 또 어떤 결혼 생활을 꿈꾸는지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의 이야기를 좀 나누죠. 제가 아내를 만나서 어떻게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얼마나 행복한지 저의 직접적인 경험을 나누곤 합니다. 그렇게 안 보이겠지만 제가 결혼한 지 18년이나 됐습니다. 결혼한 지 30년, 40년 되신 분들 앞에 있어서 부끄럽지만 그래도 18년이라는 그 기간 동안 행복하게 결혼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막 결혼하는 청년들에게는 사실 18년도 긴 시간이죠. 그런 분들에게 제가 직접 체험한 결혼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지 이야기하면요 그분들이 격려를 받습니다.
직접 보고 경함한 증거에는 힘이 있다.
책을 읽고 연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한 결혼 생활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들으면요 그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맡겨진 복음 사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 지식을 열심히 쌓아서 그 지식을 가지고 증거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직접 체험해서 직접 경험한 것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체험해서 직접 경험한 것을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 복음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우리 가정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는데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가 먹어보지도 않은 그 음식의 후기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나는 그 음식의 사진만 봤는데 직접 먹어본 적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의 부탁으로 그 음식에 대한 평가 후기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곤혹스러운 상황일까요? 후기를 좋게 써야 될까요? 나쁘게 써야 할까요? 정말 난감한 상황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는데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의 심정일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전해야지 경험해야지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을까요?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간절하게 구하고 겸손하게 구해야 합니다. 성령은 영적인 힘이 아니라 인격이시기 때문에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한 번 두 번 만난 사람하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을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성령님과 동행하는 인격적인 관계가 필요합니다.
매일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또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새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경계가 없는 나라
사도행전 1장 8절은 한 문장이지만 사도행전 전체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말씀이 사도행전 전체의 목차와도 같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구조
1장부터 7장까지는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을 기술
8장부터 12장까지는 유대와 사마리아에서의 선교 사역을 기술
13장부터 28장까지는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 사역
예수님의 복음이 어떻게 전 세계로 전파되고 확산되고 있는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나라는 경계가 없는 나라입니다.
인종적인 경계, 문화적인 경계, 사회적인 경계가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인종적인 편견, 문화적인 편견이 여전히 강력했던 시대에 주님은 타고난 정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나라의 광대함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마디로 경계가 없는 나라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나라는 수많은 경계가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만 보아도 지역으로, 이념으로 세대로 성별로 나라가 다 나뉘어졌습니다. 국민 개개인의 능력은 너무나 탁월한데 나라가 나뉘어져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죠. 한국 역사에서 온 국민이 단결했던 적은 딱 두 번밖에 없다고 합니다. 한 번은 3.1운동 때였고, 또 한 번은 2002년 월드컵 때였다고 합니다. 나라가 얼마나 나뉘었으면 이런 말이 있겠습니까?
나뉘어진 나라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가 복음 안에서 하나 될 때 주님께서 뜻하신 놀라운 일을 이룰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 됨을 위한 분명한 비전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하나 되어야 하는지, 어떠한 기준으로 하나 되어야 하는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그런 선명한 비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모든 민족이 주님 앞에 나와서 구원을 받고 진리 안에서 하나 되는 비전이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그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를 경험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2010년도 제3차 로잔대회의 마지막 날에 있었던 성찬식이었습니다. 198개국에서 모인 4,500명의 크리스천들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를 찬양하고 또 기도하고 주의 만찬에 동참했습니다.
얼굴도 다르고요.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 달랐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구원자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데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부를 수 있었습니다. 198개국에서 온 모인 형제 자매들과 떡을 나누고 잔을 나누고 함께 예수님을 찬양할 때 저는 천국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미리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올겨울에도 많은 단기 선교팀이 선교지로 떠나고 있습니다. 단기 선교의 큰 유익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믿음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되는 경험입니다. 나하고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데 예수님을 향한 그 믿음 하나로 형제 자매가 될 수 있는 경험은 너무나도 특별한 경험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면, 한국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은 너무너무 쉬운 일입니다.
나와 생각이 조금 다르고 나와 성향이 다른 사람을 만나도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나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그 안전지대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작년에 선교적 교회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통해서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취약계층을 섬기고 이주민을 섬기고 다음 세대를 섬기고 또한 창조 세계를 섬기는 그런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경계를 넘어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에게 익숙하고 나에게 편안한 안전지대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낯선 곳을 향해서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용기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때 임하실 때 그분의 능력으로 가능한 줄 믿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예수님의 명령은 명령인 동시에 약속이기도 합니다.
명령과 약속을 함께 줄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서 딱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능력은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새해에는 성령과 더욱 친밀하게 동행하여서 각자의 부름받은 자리에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교적 교회(언덕 위의 교회)
취약계층 선교, 이주민 선교, 다음세대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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